강릉지역 대침투 작전을 마치고



김영덕



본인은 1996년 9월 18일 02:00경 강릉시 안인진리 대포동 해안에 잠수함으로 보이는
괴물체가 발견되었다는 경보를 접수한 뒤 투입명령을 받아 총 50여 일에 걸쳐 8명의
공비를 사살한 전과를 올렸던 특전사 비호부대의 작전참모로서, 당시 대간첩작전에
참가하여 현장에서 보고 느낀 사항들을 정리해보고, 보완시킬 사항을 염출하여 앞으로
그와 같은 북괴의 도발행위에 대하여 유사한 작전임무 수행시 참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글을 쓴다.


우리 비호부대는 적침투 당일이었던 9월 18일 작전지역으로 전개를 시작하여,
9월 19일부터 본격적으로 작전지역에 투입되었다. 최초 OO군단장 작전통제하에 ‘탐색
및 격멸’부대로 칠성산일대에 투입되어 작전 첫날일 9월 19일 14:10경 칠성산 9부
능선상에서 적 승무원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9월 22일에는 가용 전투력부족을 인식한 군단장님의 조치로 OO연대와 OO연대로부터
각각 1개 중대규모를 작전통제 받아 적 수상안내원과 함장을 사살하였으며, OO사단장의
작전통제로 전환된 9월 30일에는 석우동 일대에서 옥수수단을 수색하다가 적 기관장
1명을 추가 사살했다.


10월 3일 오대산일대에 재투입되어 11월 4일까지 OO사단장 통제하에 ‘정밀탐색부대’로
운용되던 중 산머리 곡산지역에 나타난 적 정찰조의 상황을 접수하고 서화지역으로
이동하여 작전을 준비하던중, 정찰조원과 교전이 벌어진 연하동지역에 긴급투입되어
OO사단장 통제하에 11월 5일 10:30경 적 정찰조 2명을 사살함으로서 작전을 종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그동안 전 작전지역에 참가하여 여러 야전군 지휘관들의 통제를 받으며 협조된
작전을 수행하면서 적 8명을 사살한 전과로 1996년 12월 30일 영예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다. 우리 비호부대가 이런 영광을 얻은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부대성격과 특징을 잘 알고 효율적으로 운용해준 야전군 지휘관들과 동계작전으로
전환되는 어려운 작전환경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급식, 보온대책 그리고 세탁/온수트레일러를
지원해주고 심지어 매복작전용 깔판과 군화덮개까지 제작 보급해준 군수관계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확신한다.



강릉으로의 출동



1996년 9월 18일 06:00경 당일 일직사령으로 근무중이던 본부대장으로부터 동해안
강릉 안인진리 해상에 잠수함으로 판명되는 괴물체가 발견됐고 1군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던가!


우리 비호부대는 각개병사의 대침투작전용 출동군장에서부터 지역대단위로 출동장비(탐침봉,
위장크림, 피아식별띠, 야전위생비닐 등)에 이르기까지 평상시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고,
’96년 초부터는 사령관님의 지시로 대침투작전과 관련된 장비들을 제대별, 부서별로
전량 SET화 하여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대비해왔으며, 각종 대침투 사례집을 활용해서
간부교육을 강화해 왔었다. 또한 그날은 그동안 변경된 사항들을 보완하고 최신현황을
유지한 대침투작계를 재발간하여 인쇄를 끝낸 날이기도 했다.


당일 여단장님께서는 제주도에서 전술훈련중이던 OO대대 현장 지도방문을 계획하셔서
인사참모를 수행시켜 출발을 하시려던 날이었다. 동해안 상황을 접수받으신 여단장님께서는
제주도 현장 지도방문 계획 일정을 취소하시고 동해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예의
주시하셨다. 작전참모로서 나는 상황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여단장님께 건의를 드려,
예하 대대에 ‘진돗개 하나’에 준한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아울러 휴가중이던 OO대대의
3개팀과 특임대 1개팀을 복귀시키도록 우선 조치했다.


우리 비호부대는 부대의 특성상 평소 각종 전술훈련 및 주둔지훈련을 통하여 대침투작전과
관련된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고 이에 준하는 출동장비도 평시에 잘 준비되어
있어서 갑작스런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에 따른 출동준비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오후 15:00경 사령부를 경유하여 합참 작전명령이 드디어 하달되었는데, 17:00까지
2개 대대를 K-18(강릉)기지에 전개시켜 OO사령관의 통제를 받으라는 간단한 내용의
명령지였다. 이미 출동준비를 완료한 OO대대가 사령부 헬기장에서 작전투입을 대기하고
있는데 항공사령부측 사정에 의해 기동자산이 CH-47에서 UH-60으로 다시 CH-47등으로
계속 변경되면서 출발이 늦어지다가 16:30경에야 UH-60기종 15대가 도착하였다. 사령부
헬기장에서 OO대대와 여단장님 그리고 정보장교, 정보선임하사, 전속부관이 포함되어
제1제대로 사령관님의 전송을 받으며 작전지역으로 출발했다.


헬기가 태백산맥을 넘으면서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어 고도를 10,000ft 이상
높여 비행을 했다. 시계확보가 어려워 강릉 상공에서 30분 이상 선회 비행하다가
17:40분경에야 강릉 비행장에 착륙할 수 있었다.


우선 병력들에게 19:00시까지 연병장에 A자형 개인 천막을 설치토록 조치하고
공군측 기지작전과와 협조하여 겨우 석식을 시킨 후 휴식을 부여해 줬다. 그리고
기지 평가단장 사무실을 협조받아 임시 CP로 운용하며 작전을 준비했다.


뒤이어 바로 투입되기로 했던 15대대는 항공기 사정으로 명일 오게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또한 OO군단 TOC와 전화로 연결해서 작전과장과 통화를 했더니 군단 TAC이
금일중 OO군 지단이 위치한 OO연대 본부로 이동예정이고 작전명령은 작성중에 있으나
직접 명령수령은 불가능하며 FAX가 설치된 OO연대에서 찾아가라고 했다. 각종 우발상황에
대비,나는 조종사 대기실에서 상황을 유지하고 정보처 지역특기담당관을 보내서 19일
03:00경 명령을 수령해왔다.


명령내용은 B-1분구 탐색격멸부대로 OO특공연대(-)를 작전통제하여, B-1분구는
여단장 책임하에, B-2분구는 OO특공연대장 책임하에 작전하라는 단편명령 형태로
많은 고민을 해야 할 사항이었다. 준비한 지도를 놓고서 밤을 지새우며 지형을 분석하고
적 예상 은거지와 도주로에 대한 연구를 한뒤 정밀수색이 가능하도록 부대배치를
고려했다.


우선 도착한 OO대대가 주요 은거 예상지역인 칠성산, 만덕봉, 982고지 일대를
정밀수색토록 하고, 명일 오후에 투입이 가능한 OO대대는 예상 도주 방향인 매봉산,
606고지, 칠봉산일대에 배치, 운용할 계획 및 명령을 완성하여 05:00경 먼저 OO대대
작전장교를 불러 밤새 고민하며 만든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여단장님께 보고드리고
난 뒤 OO군단 TAC이 이동해 온 OO연대본부로 들어가서 군단장실과 인접한 연대 군수과에
여단장님과 함께 단촐한 여단 TAC을 설치했다.



첫 개가! 적 승무원 3명 사살



작전준비로 밤을 세워 지친 상태에서 OO연대를 찾아가는데 도중에 길을 혼동하여
얼마나 곤혼스러웠었는지…


군단장님께 보고를 드리고서 OO대대를 헬기로 투입하기로 했으나 아침 안개로
인하여 헬기기동이 불가하였다. 그래서 여단장님께 건의드려 차량으로 투입하기로
결심을 얻어 07:30에 경자대 차량지원하에 6지역대는 만덕봉방향, 4지역대는 방터골에서
칠성산방향으로, 5지역대는 단경골에서 982고지 방향으로 투입했다. 투입되는 병력
규모에 비하여 작전지역이 넓기는 했지만 이번 작전만큼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에
서둘렀다.


OO대대 병력투입을 지시하고서 09:30에 K-16(성남)에서 C-130수송기로 출발한
OO대대와 여단참모부를 맞이하러 강릉비행장에 다시 가서 도착상황을 확인했다. 이어서
전날밤에 수립한 작전계획과 명령을 OO대대장과 작전장교를 불러 하달하고 날씨가
맑아짐에 따라 헬기레펠로 신속히 병력들을 투입하기 위해 육군항공과 협조했다.
그런데 OO대대가 산악극복훈련에 나가면서 여단에서 보유중인 8자고리, 안전대 등
레펠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OO대대 병력들이 헬기레펠방법으로 신속히
작전지역에 투입되기까지는 다소 어려움이 따랐다. 어느 경우는 유격수갑이 없는
팀도 있었고, 심지어 개인로프로 안전반도를 대신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미비점들을 보완해가며 15대대 작전팀들을 출발시키던 중 OO대대 1,5중대로부터
적과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상황보고를 받고 곧바로 여단 TAC으로 돌아와 보니 긴박한
상황보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4:00경 적과 접촉!… 포위… 생포… 이어서 2명생포…하더니
3명을 사살했다는 무전보고가 이어졌다. 15:30경 여단장님께서는 헌병대장, 기무반장,
정전과장과 경계병의 엄호를 받으며 954고지 9부능선 현장으로 나가시고 나는 남아서
지난밤의 피로를 의식할 틈도 없이 상황을 유지하며 정리했다.


4지역대는 07:30 헬기를 기다리다가 안개 때문에 차량으로 방터골로 이동하여
08:40경부터 954고지 방향으로 상향식 수색을 실시하며 올라갔다가 칠성산(칠성대)
정상에서 전투식량으로 중식을 한 후 하향식으로 올라왔던 인접능선을 따라 정밀수색중
1중대 김학성 중사와 이재관 중사 그리고 구영주대위가 먼저 적 3명을 발견하고 제광석
대위의 2중대와 합류하여 적 3명을 포위했다고 한다.


그리고 AK소총을 들고 있던 1명과 무장을 하지 않은 2명을 분리하여 2명에 대해서는
상의까지 벗도록 한 상태에서 지역대장에게 보고하고 이후에는 지역대장이 지휘를
했단다.


성공요인을 보면 적 은거예상지역에 먼저 투입 가능했던 OO대대 운용을 결정하고,
투입 당일 최초 헬기에 의한 고지상 레펠을 계획했으나 안개로 인한 제한 때문에
곧바로 우발계획인 차량을 이용해 투입한 결과, 헬기보다 은밀하게 아군기도를 노출하지
않고 적을 탐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밀림처럼 우거진 급경사 산악지역을 적극적인
자세로 작전에 임한 발견자들의 노력이 특히 돋보이는 작전이었다.


평시 취약지 상주개념으로 강원도 가리왕산, 박지산, 오대산 일대에서, 전술종합훈련을
계속한 관계로 현지지형에 익숙한 비호부대만이 이루어낼 수 있었던 신뢰성 있는
작전이었다.


9월 20일 20:00 OO군단 TAC에서 작전회의를 하면서 여단 부대운용을 군단장께
보고드렸다. 통상 ‘특전부대를 꼭 고지에 투입, 하향식 수색을 강조하시는데 단점도
있습니다. 헬리레펠로 동시에 1개 대대를 투입시키기 어렵고(헬기장 미비, 수목 표고)
또한, 적이 은거하여 있다면 아군의 기도가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적과 접촉시
대응할 수 있도록 기동타격대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명일 부대운용은
OO대대의 경우 칠성산, 982고지, 만덕봉에 지역대별 1개팀씩 헬기레펠로 투입 차단
진지를 점령하고, 지역대(-) 규모로 각각 단경골, 방터골, 석우동 일대에서 상향식
수색을 실시함으로써 적을 압박, 고지상에서 적을 사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뼈아픈 과오! 적 정찰조와 조우 이병희 중사 전사



군단장께서도 동의하셨고 그런 개념으로 대대장들을 불러 명령을 하달했다. 9월
21일 07:28경 UH-60헬기 6대로 만덕봉, 칠성산, 매봉산, 606고지 일대에 12,15대대
각 3개팀을 투입할 수 있도록 출발시켰다. 09:30경 982고지에서 적과 교신중이라는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속으로 예상이 적중했다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는데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1명(중사 이병희)이 두부관통상을 입었으니 후송헬기를 요청한다는 보고와 적은
2명이고 얼룩무늬 베낭에 체크무늬 상의를 입었으며 M-16소총을 휴대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만만한 승무원이 아니라 정찰조라고 확신했다. 후송헬기를 요청하고 적과 접촉을
계속 유지하라고 지시한 후, 조경래 원사 등 3명을 구조헬기에 동승시켜 출발하였으나
구조장비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 직접 로프를 내려 사람손으로 끌어 올리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구조활동을 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겨우 11:50경에야 동해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14:10경 이병희 중사는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당시 차단2조(조장 중사 이병희)가 진지점령을 위해 이동중 바위틈에 은신중이던
적으로부터 기습조준 사격을 받았단다. 그가 휴대했던 소총을 보니 4발은 이미 사격을
했고 1발이 장전된 상태였다. 그는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 가면서도 끝까지 적을
향해 사격하는 불굴의 군인정신을 발휘했다. 대침투작전에서 은거중인 적을 발견한
것만도 성공인데, 게다가 접촉을 했었고 차단/봉쇄선에는 OO사단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때 도주한 적을 다시 발견/사살하지는 못했다.


이 작전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다. 첫번째는 지난 19일 적 승무원
3명을 비교적 쉽게 사살한 탓에 작전에 임하는 자세에 긴장감이 해이해졌던 점을
들 수 있다. 분명히 차단진지를 점령하도록 했었고, 그런 경우 팀단위로 먼저 차단지역
일대를 정밀수색하고 조별 진지를 점령해야 했는데 팀단위 정밀수색없이 조단위 배치를
하는 전술적 과오를 범했다.


그리고 헬기 이동간에는 삽탄만 하고 지상착륙과 동시 전 요원이 장전토록 지시했으나
팀장의 지나친 안전강조로 조장만 장전을 했다고 한다. 이번 차단 2조가 무장공비를
섬멸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도 조장이었던 이병희 중사만 장전을 하였기 때문에
다른 조원들은 공비에 대한 조건 반사적인 대응사격을 하지 못한데 기인했다. 안전위주의
소극적 자세가, 이번 작전의 결정적 시기에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적과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장전을 위해 단 1초를 허비한다는 것은 은거하여 먼저
보고 격발준비 상태에 있는 적의 탄알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육훈련에서는 각종 비전투 손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연히 안전위주의
병력운용이 필요하나 실전에서는 임무완수를 위하여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작전에
임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줬다.



다음으로 소총성능 문제를 언급하고 싶다. M-16소총은 개머리판 속에 완충기뭉치가
내장되어 있어 탄피방출 및 자동장전에 문제가 없으나, 총몸뭉치 속에 완충기가 내장되어
있는 K-1, K-2계열 소총은 탄피가 제대로 방출되지 않는 기능고장이 자주 발생한다.
이번 작전중에도 기능고장으로 인하여 적을 눈앞에 두고서도 즉각 대응사격을 하지
못한 인원이 발생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소총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경우
얼마나 큰 손실을 입게 되는가 여실히 보여주는 작전이었다. 소총결함 부분은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한 부분이다.


끝으로, 각종 상황발생시 응급구조 헬기의 대기문제와 구조장비문제다. 인명을
구조하기 위해 온 헬기에 호이스트(인양장비)가 장착되지 않아 사람의 손으로 밧줄을
내리고 들어올리는 등 구조활동간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고 또한 구조헬기에
응급구조킷이 없어 강릉소방서에서 빌려다 사용을 해야 했다. 여러가지 아쉬움이
남는 작전이었다.



9월 21일 오후부터 여단장님의 지시에 따라 칠성산 정상에 헬기장을 신설하고
여단 TAC과 헬기장 사이에 유선을 가설했다. 그리고 주간에는 여단장님이 현장에
위치하시고 야간에는 작전참모인 내가 현장에서 위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부대가 혼재된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오인사격과 각종 안전사고를 예방하면서 원활한
협조체계를 갖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불행중 얻은 전과!


적 안내원 및 함장 사살



적 정찰조와 조우한 이후, OO군단장님께서는 칠성산과 단경골, 그리고 444고지
및 사기점골을 연하여 소차단선을 점령하도록 조치하셨고, 넓은 작전지역에 비해
가용전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OO사단 OO연대 7중대와 OO사단 OO연대 9중대를 14:13분
투입토록 지시하였으나 준비시간이 있었기에 16:30 이후부터 병력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투입된 야전군부대와 우리 특전부대 사이의 원활한 통신소통에
많은 문제가 유발됐다. 야전군에서는 신형 P-999K무전기가 보급되어 운용되었고 우리
특전부대에서는 구형 P-77을 사용하고 있어서 무전체계가 짜임새있게 구성되지 못했다.


이러한 무전체계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야전군과의 통신소통을 위해, OO연대 정보과장과
OO연대 2대대 작전장교를 동행한 상태에서 차단선 점령을 진행했다.


작전회의차 17:30경 여단장님은 헬기장으로부터 내려가시고 17:30부터는 내가
현장에 위치하였는데, 서둘러서 확인한다고는 했지만 주·야 작전 전환시간(19:00)이
지난 19:45경에야 병력배치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날 초저녁부터 외곽차단선 일대에 끊임없는 사격이 계속됐다. 보병부대에 새로
보급 편제된 K-3신형 경기관총 예광탄이 밤하늘을 수놓았는데 문제는 그중 일부유탄이
우리가 위치해 있던 헬기장에 날아와 박히는 것이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칠성산정상에서
유탄을 피해 헬기장을 중심으로 빙빙 돌아야 했던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군총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다. 한편에서 오인사격을 하면 맞은편
아군들도 마치 도미노현상과도 같이 오인사격을 계속하는 등 사격통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애로사항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자정을 넘기면서 좀 잠잠해지는가 했는데 01:45경 약 500M 떨어진
982고지 정상에서 수류탄 소리가 들리고 이어 7중대장을 호출해 보니 적과 교전중이며
상황조치중이라 교신이 어렵다는 보고였다. 적과의 접촉으로 확신하고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말고 날이 밝으면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연발 사격소리가 밤 하늘로
울려 퍼지면 조용해진다. 날아 밝아오기까지 기다리는데 얼마나 초조하던지…. 06:00경
날이 밝아오고 간밤에 벌어진 상황을 확인해보니 아군 1명(일병 송관종)이 적 수류탄에
의해 희생됐고, 1명이 총상을 입었으며 적 1명을 사살했다는 보고를 접수했다.


7중대장과 교신중, 헬기장 옆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소차단선 후사면에서 적 1명이
출현하여 아군병사에게 사격을 했던 상황이었는데, 소란이 벌어진 현장에 가서 결국
적을 사살하고 수류탄 투척으로 확인 사살하는 현장에 함께 했다.


함장이라는 정용구를 사살했고, 982고지에 가보니 적 수상안내원 김윤호가 싸늘하게
굳은 몸에 깨끗한 복장을 한 날렵한 체구의 시신이 되어 엎어져 있었다. 아군병사
1명은 무릎에 파편상을 입고 넋을 잃고 앉아서 적을 잡았다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곧바로 돌아와 정용구를 사살하면서 두부관통상을 입은 강정영 일병을
헬기를 요청해서 후송하였으나 그 역시 나중에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적에 의해 쓰러진 우리 부하들과 우리 총탄에 비참하게 죽어 거꾸러진 적을 보면서
치열한 전장상황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이번 작전은 주간에 이병희 중사의 차단조와 조우했던 정찰조의 도주차단을 위한
OO군단장님의 적절한 조치와 혼재된 부대의 통합지휘를 위해 책임있는 간부가 현장에
위치하여 차단 진지 점령을 무리해가며 끝까지 확인하고 지휘체계를 확립하여 거둔
성공이었다.


추석연휴를 작전지역에서 보냈다. 무장공비 잔당 소탕을 위해 우리가 작전지역에서
추석을 보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작전지역통제에 따라 현지 주민들은 성묘문제와
생업에 큰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파트 단지별로 빵이며 음료수를 보내주는
정성이 여간 고마운게 아니었다.


그동안 운장산에서 고등산악훈련중이던 OO대대가 추가로 9월 28일 오전에 작전지역에
투입됐다. 그 사이 우리 비호부대는 지휘관계가 조정되어 OO군단 직접통제에서 OO사단장
통제하에 들어갔다. 작전 지휘체계가 바뀌면서 나는 OO군단 작전회의, OO사단 작전회의에
바쁘게 참석하면서 특전부대의 운용개념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특전부대의 특성상
주로 탐색 및 격멸작전과 제한된 매복작전, 그리고 기동타격대로 부대가 운용될 수
있도록 관련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조언하고 효율적인 부대운용이 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과거의 교훈을 되살린 성공! 석우동 적 기관장 사살



OO사단장 통제하에 작전을 하면서 C분구를 맡게 됐고, 사단장께서는 우리를 매봉산
이북에서 운용하겠다고 하는 것을, 그동안 수행했던 작전을 토대로 지형숙지가 잘
되어 있는 칠성산/단경골 일대를 담당하겠다고 간곡히 요청하여 그대로 기존 작전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작전개념이 최초로 2박3일 작전으로 변경되어 OO대대는 적 은거 및 은신이 예상되는
단경골과 방터골 일대 정밀수색 임무를 부여했고 석우동 지역은 OO여단 3대대가 맡았으나,
유림이 사살되면서 석우동을 담당한 OO여단 3대대가 본래 작전지역인 영동 고속도로
이북으로 이동하고 나니 석우동지역이 공백지대가 되고 말았다. 이때 OO사단장님께
건의드려, 유림사살지역과 인접한 칠봉산지역에 투입했던 OO대대를 29일 석우동 일대에
투입시킴으로써 석우동 공백지대를 통제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2박 3일 작전이 종료되는 30일 15:00경 TAC에 무전이 접수됐다.
석우동 일대에서 옥수수단을 세워놓은 밭을 수색하던 김민규 중사가 옥수수단 속에
손을 집어 넣는 순간 뭉클한 사람몸이 느껴져 확인해보니 적들중 한명이 은신해 있음을
알고, 투항을 권고했으나 반항하여 적(기관장 만일준)을 현장에서 사살했다는 보고였다.
민가와 인접한 지역이라 걱정이 앞섰고 재차 교신하여 사살된 적의 소지품을 확인해보라고
했더니 권총이 있다는 보고에 안심이 됐다.


작전지역은 OO사단 OO연대 3대대가 차단선을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고, 도로와
가까운 지역이라 언론 보도진이 밀어닥치고 한동안 소란했다.


이번 2박 3일 수색작전을 이끈 1중대장은 지난해 연초 대비태세 강화기간중 사례집으로
배부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소탕작전을 보면서 당시 쫓기던 공비가 옥수수단에
숨어 있었던 점을 기억하여 틈틈이 팀원들에게 교육시켰던 바, 차단선 부대들이 수차례
반복수색을 실시했던 민가와 근접한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이와 같은
성과를 얻어냈다.


작전투입 전 여단장님께서 공비가 침투한지 2주 정도가 지났으니 반드시 식량을
구하러 산속 깊은 곳에 은신하지 않고 식량획득이 용이한 민가 가까이 내려올 가능성이
많으니 관심을 갖고, 특히 차단선을 관측할 수 있는 도로나 경작지와 연한 와지선에
중점을 두고 수색하라는 지시가 주효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작전은 적이 아직도 우리 차단선 내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데 의미가
있었다.



또 다시 출동! 오대산으로



9월 30일 석우동 승무원 사살 이후 적과의 접촉이 묘연한 가운데 북괴의 1,000배
보복발언과 러시아에서 최영사 피살사건이 있은 후 한반도내에 긴장이 조성되자 합참의
정규전 대비 지시에 따라 10월 3일 여단은 주둔지로 복귀했다. 그 사이 10월 8일
오대산 답동리에서 송이버섯을 채취하던 민간인 3명이 피살됨에 따라 OO여단이 투입됐다.
아울러 특전사령부가 투입되고 기투입 작전 활동중이던 OO여단 및 OO사단, OO사단
수색대대 OO특공연대 등 비슷한 성격의 부대들을 통제하여 오대산 내곽 작전을 특전사령관이
OO군사령관 통제하에 담당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그리고 10월 13일, 제주도 전술훈련으로 대침투작전에 그동안 참가하지 못한 OO대대와
최초 침투했던 OO대대가 다시 투입되었는데 작전참모로서 일부 실무자들을 대동하고
함께 출발했다. 벌써 쌀쌀해진 가운데 하진부리 비상활주로에 도착하여 OO대대는
OO여단장에게, OO대대는 OO여단장에게 작전통제권을 주고 나는 특전사령부 TAC에
위치하여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우선 날씨가 추워지기 때문에 24인용 천막을 조치하여
2개팀씩 숙영토록 하고 지역 한전출장소와 협조하여 조명용 전등을 가설해 주었으며
여단에 연락하여 난로를 설치토록 조치했다. 또한 목욕/세탁트레일러를 요청하는
등 전투근무 지원을 제대로 갖추어 동계 장기작전에 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 사이에 군 수뇌부의 이동이 있었고 합참의장으로 새로 취임하신 윤용남 대장이
오셔서(10.20) 전투지휘용 밴트럭에서 장시간 허심탄회하게 작전 지휘관들과 의견교환이
있었다. 특이사항은 절대로 작전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최후의 일인까지
사살하고 그렇지 않으면 동계에 관계없이 작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피력하셨다. 그리고 중앙 합심조를 구성하여 원점에서부터 적의 기도를 다시 파악하라는
지침이 계셨다.


OO여단은 우여곡절 끝에 독수리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서 10. 20일 주둔지로 복귀하고
여단장님께서 내려 오셨다. 여단장님이 오시면서 작전은 더욱 체계화됐고 여단은
OO사단장 작전통제하에 오대산지역 내곽작전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투근무지원은
여단장님의 힘을 빌어 더욱 향상되어 각 대대가 작전을 마치고 숙영지로 복귀하면
작전에 참가한 어느 부대보다도 좋은 조건하에서 정비 및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10월 8일 이후 적은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특전사령부
통제를 받던 10월 16일에는 OO군단지역 군축교일대에서 거수자 출현 신고가 있었는데
너무 쉽게 종결처리 됐었다.


10월 24일 비 내리는 심야에 영동고속도로 상에서 거수자 신고가 들어와 빗속에
OO지역대를 이끌고 직접 출동했었고, 태기산 일대 거수자 출현신고를 접수하고는
OO대대를 야간에 헬기와 차량으로 투입시켜 밤새워 차단선을 확보하고 다음날 수색정찰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모두가 오인, 허위 제보로 인한 출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단장님부터 각 개병사까지 우리는 혹시나 모를 공비의 출현에 여러 차례 오보에도
불평없이 출동하여 작전에 충실히 임했다.


합참의장님, 군사령관 등 VIP 순시와 1군주관 작전회의는 우리가 비교적 야전성있게
지휘통제실을 운용하고, 숙영지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인지 주로 여단 야전지휘소가
주요 방문, 회의장소로 제공되었다. 이는 매우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통합방위 본부장 지시에 의한 중앙 합심조 구성시 작전부대요원중 칠성산일대
작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내가 선정되어 10월 21일부터 27일까지 활동하도록
공문이 내려왔다.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침투원점, 정찰조장 사살지점, 11명 자살지점, 주민신고에
의한 단경골 승무원 3명 사살지점을 합참, 정보사, 기무사, 안기부, 1군 정보요원
및 다대포 사건의 전충남, 귀순자 안명진씨 등과 답사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여단과 관계되는 칠성산 정찰조와 교전지점에서는 공비가 사용한 무표시
M16 탄피 9개를 추가로 찾아냈고 (총 15발) 탄피 정밀감식을 의뢰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오대산 공비와 동일인인지 식별토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병희 중사 전사시
상황을 재연하여 그가 용감하게 교전했던 사실과 우리가 추격노력을 계속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오대산지역까지 동행하자는 것을 3일 동안만 활동하고 부대작전을 위해 아쉽지만
복귀했다. 이어 OO사단 작전회의에 참석하면서 사단장님께 특전부대의 팀단위로 강화된
지휘체제를 설명하여 분권화된 팀, 조단위 운용으로 적으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증대시킬 수 있음을 이해시켰다. 그러나 적과의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작전병력을
계속 긴장시켜가며 독려하기가 무척 고민스러웠고 11월이 되면서 추위와 싸워야 한다는
또다른 어려움을 만나게 됐다.


그럭저럭 작전 참모 보직 2년이 되가면서 지휘관께서 보직 걱정을 해주시고 참모요원들도
교대근무를 하여 일이 한결 수월해지니 ‘작전참모도 한번 서울에 다녀오라’는 말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내고향 같은 12사단 지역으로 출동!


적 정찰조 2명사살 작전 종결



여단장님 배려로 11월 3일 19:30 작전지역을 출발 거의 1개월 만에 서울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었고, 다음날 사령부에 들어가 경호작전문제, 부대교대 등을
토의하고 여단에 왔는데 11월 4일 17:00경 12사단 산머리곡산지역에서 싸리 작업하던
병사가 적공비 2명을 발견했다는 상황전파가 와 있었다.


서울에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서둘러 작전지역 1:25,000 지도를 준비하여 하진부리로
출발하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만감이 교차하며, 분명히 이번엔 우리 손으로 작전을
종결할 수 있으리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7년 동안 눈에 익힌 인제 원통지역이 아닌가?
육대를 수료후 30대 초반에 3군단지역 12사단에 보직되어 열심히 근무하고, 대대장직을
마친 다음 40의 나이가 되서 계획인사로 내려오지 않았던가? 눈에 선한 거점! 소로길…
땀을 흘리며 행군했던 향로봉-칠절봉-매봉-말고개-진부령 길은 항상 병사들과 함께했고,
대대장의 지휘차량을 환자/낙오자 수송용으로 사용했던, 당시 야외훈련에 대한 아득한
기억들을 떠올리니 내게 분명 길이 있을 듯 싶었다.


도착해보니 OO대대는 이미 이동을 완료하여 내가 대대장을 했었던 서화대대에
가 있었고, OO대대와 여단 본부는 11월 5일 02:00에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현장으로
출발했다. 선두는 OO군단에서 군기과장으로 근무를 했던 헌병 소령이 맡고 후미는
지역을 잘 아는 내가 통신차량 등을 독려하며 가는데 운두령을 넘으면서 통신 FM차량이
고장 났다. 구난차를 불러 조치하고 졸음에 겨운 운전병을 깨워가며 밤새 강행군하여
06:20경 서화대대에 도착해보니 여단 지휘소로 지정해준 대대에 OO사단 사령부가
들어와 혼재되어 있어,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대대장이 동기라는 인접 2사단 63포병대대로 우선 여단장님을 안내해 드리고 OO사단
TAC이 위치한 대곡리 대대에 가보니 사단장님과 작전참모만 TAC에 나와 있는데 군단
TAC과 교신도 안되었다. 그리고 우리 작전지역은 OO사단장 통제하 최초 발견 원점
부근인 산머리 곡산 근처에 정밀수색 부대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04:28경부터
창바우 연하동 지역에서는 매복조와 공비간에 교전이 있었다는데…


답답하여 공중전화로 군단 TAC과 연결 작전과장(참모)와 통화하여 여단이 교전지점과
가까운 남교리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하고 63포병대대로 돌아와
여단장께 보고드리고 OO대대는 헬기투입을 위해 서화 비상활주로에 대기시키고 OO대대를
인솔하여 OO연대 본부지역으로 이동했다.


08:50경 OO연대 본부에 도착해보니 OO사단 TAC이 설치되어 있었고, 사단장이 위치해
계셨다. 가용병력이 부족하여 OO연대 수색중대 일부 병력으로 임시 조치한 상태에서
특전대대가 도착하니 사단장께서 무척 좋아하셨다.


적과 교전지점을 알려주며 구두명령으로 투입하라고 지시하셨다. 과거 정보과장
근무를 하면서 독가촌 관리를 했던 연하동 계곡 입구였다. OO대대 중대장들을 모아놓고
지형설명과 투입방향을 지시하고 먼저 준비된 7지역대부터 직접 인솔하여 출발했다.
용대초등학교 앞에서 OO사단 병력들이 길을 막아 혼동이 일어나 차가 정체되어 투입이
지체되자 대대장에게 욕을 해가면서까지 서둘러 가는데 이번에는 백담사 입구를 조금
지나 OO연대 1대대 앞에 주행 차선을 군용트럭이 막고 있어서 긴박한 상황을 고려해
무리해가면서 무조건 반대 차선으로 들어가 앞만 보고 달렸다.


09:50경 창바우를 지나 현장에 도착해보니 개울건너 숲속에서 계속 적의 실탄이
날아오고 그때마다 아군이 피해를 입고 있는 순간이었다. 우선 능선 후사면으로 7-8-9
지역대 순으로 투입하고 이어 도착한 OO공수 OO대대를 차단선 도로 뒤쪽에 만약을
위해 배치했다. 이어 OO대대 4개팀이 헬기로 인접 능선에 투입됐다. 그 사이에도
6-7명의 환자가 적의 사격에 의해 실려나갔다. 특히 3군단 작전참모 운전병이 왼손에
총을 맞아 손목이 끊어져 날아갔고 OO연대 통신 소대장이 가슴에 관통상을 맞고 들려나오는
것을 7호차를 이용해 후송해주는 등 상황이 심각했다. 여단장님과 나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도로옆 배수로를 기어다니며 현장을 확인하면서 투입된 요원들을 통제해야만 했다.


그 사이에 OO대대는 적 후사면 능선에 전개 완료했고 아군을 향해 마지막 발악으로
조준사격을 가하는 적을 유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OO대대 본부 요원으로 잠정팀을
편성하여 적이 위치한 우전방으로 하천을 따라 기동시키려 하는데 그런 위험한 상황속에서도
의연히 나서는 OO대대 정보장교, 본부 중대장, 김영호 원사 등을 보면서 역시 특전부대
요원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지에 그들을 몰아넣어야 하는 심정은 비감에 사로잡혔고
손짓발짓으로 그들의 기동을 통제해야 했다.


결국 10:30경 7지역대 3중대 요원중 장선용 상사가 적 정찰조 2명을 뒤에서 보고
조준사격하여 작전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투입전 OO연대 연병장에서 지도를 보면서
꼭 후사면을 고집하지 말고 적으로부터 은폐만 된다면 하천 바닥으로 기어가 적에게
접근하라는 내 지시를 기억했다는 그의 말을 나중에 들었다.


이번 작전의 성공요인은 9월 21일 칠성산에서 정찰조와 조우시 접촉유지에 실패한
과오를 만회하고야 말겠다는 여단 전장병의 의지와 외람되지만 작전지역에서 6-7년간
근무하면서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적시 적절하게 상급부대에 부대운용을
건의하고, 신속하게 이동하여 과감하게 투입한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후의 단상들



후회가 없을 만큼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임했던 대침투작전을 마치고 복귀하면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는 자랑보다는 희생자들과 야전군에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이번 작전이 종료되면서 합참에서는 작전에 대한 공·과를 조사하기 위한 팀이 구성되었다.
당시 그 회의에 참석해서 합참의 조사에 대해 몇가지 따지기도 했다.



‘오대산 작전 지휘체제 이원화’를 문제삼아, 그건 합참지시에 의해 그런 작전지휘체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10월 3일 북괴의 보복발언에 따라 정규전 대비차원에서
일부 작전부대를 원복시킨 사항에서도 문제를 제기해 그것 역시 합참조치 아니었냐고…



검열단 요원으로 편성됐다가 다시 작전부대 작전참모로 검열을 받으면서 명령근거를
찾을 때는 급박한 상황에서 구두명령도 있고, 결재누락도 많으며 상황일지에 제대로
적지 못한 부분도 많았는데, 너무나 행정위주의 검열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그리고
칠성산에서 적 정찰조와 조우상황을 확인하러 갔을 때에도 최초 합신을 안한건 1군·8군단의
문제였는데, 그리고 막말로 적과 접촉을 유지해 준 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니었는가?
하는 항변도 해봤다. 그 자리에서 다시 무표시 M16 탄피를 또 하나 찾았는데 가장
아쉬움이 남는 작전이었다.


연하동작전 현장검증에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 작전팀을 투입하여 거둔성과가
이번 작전을 종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재확인하고 가슴뿌듯했다. 작전을
마치고 주둔지로 복귀하고난 후에도 적들과 벌어지는 숨막히는 상황을 조치하고 뛰어다니며
긴장의 연속이었던 작전현장에서보다도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전투상보, 결과보고 강평을 통하여 대침투 작전 교리면에서 수색정찰과 탐색 및
격멸 그리고 봉쇄선과 차단선의 의미차이 등 용어의 통일을 건의하였고, 수색, 매복작전
관련 준칙 및 요령, 잘 지켜지지 않는 세부 전투기술과 기도비닉유지, 작전보안 차원의
전장정리 습성화 등을 정리하여 앞으로 언제 어느 때 어떤 형태로 벌어질 줄 모르는
대침투작전을 위하여 교훈이 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한 밀림화된 급경사의 산악지형에서 작전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단련,
적과의 의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정신전력, 급박한 상황에서의 즉각조치 사격,
신속한 투입보장을 위한 헬기레펠 기술 숙달과 야간전투시 사격통제 피아식별 방법
등을 교육훈련 소요로 염출하여 실전적 감각을 갖춘 훈련이 될 수 있도록 훈련예정표에
반영 실시중에 있다.


아울러 작전간 많은 문제점으로 대두됐던 각종 통신장비, 야간투시경, 헬기에
의한 투입시 신속한 기동보장을 위한 패스트 로프장비 SET화와 방탄헬멧 성능향상,
전투식량 질 개선, 정글극복장비 소요제기, 산재하여 있는 헬기장 규격확장 및 평시
관리에 대한 관심제고 등을 건의하여 대부분 이미 조치받았다.



마지막으로 작전기간중 언론보도와 관련된 사항을 돌이켜보면, 언론회사의 경쟁적인
취재로 말미암아 수많은 오보를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내보냈다는 점에 대해 섭섭한
생각이 든다. 실전에 참가하여 작전에 임하는 각개병사에서부터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오보/추측보도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본터라 언론의
부작용에 대하여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차단진지 점령중 적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둔 이병희 중사가 헬기레펠중
적의 저격을 받았다느니, 작전간 야간에는 수색작전을 실시하지 않는데 수색작전을
한다든가, 조작된 OH-58 헬기운용화면 등 추측기사화된 오보내용이 아무런 근거없이
무책임하게 난무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자들이 상급부대를 빙자한 전화 문의 형식으로 작전내용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결국 언론보도의 문제는 작전보안유지와 작전에
임하는 군의 홍보, 병력의 사기, 국민의 알 권리 등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기술적인 통제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시달리고(?) 정리하고 준비했던지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이 지나간 지금 아직도 생생한 OO군단장님의 자신감에 넘치는 부대지휘! 명쾌한
결론과 항상 진지한 자세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전현장에서 불철주야 수고하신 여단장님의
모습! 그리고 현장과 지휘통제 실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느라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최선을 다한 참모/실무자들이 기억에 남는다.


끝으로 불치언장도후회(不治垣場盜後晦)라는 말이 떠오른다. 도적 맞은 후에 담장을
수리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번 강릉지역 대침투작전을 계기로 우리 군이 확고한
안보의식을 통하여 거듭나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군이 될 수 있기를 다짐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쫼



(김영덕 중령님, 정말 고생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