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광주사태 보고서를 어떻게 고쳐야
할 것인가?
군사기고가 李 徹 常
… 해마다 5월이 되면 우리는 무언가 못다한 이야기들을 찾아
헤맨다. 이른바 「광주사태」라고 불리던 17년 전의 비극! 다행히 6공화국 말기에야
겨우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 정의되어 그나마 일부 명예 회복이 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이자 상처로 남아 어두운 그림자로 우리들 곁을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
… 본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계엄사)의 기록문서를
최초로 찾아내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한다. 확언컨대 이러한 시도는 군에 대한
비난이나 매도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것임은 물론이다. 단지 군의 기록을 재조명하여
재수정함으로써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하여 그동안 일부 전 현직 군인들이 지녔던
부정적 인식을 교정하는 데 일조하고, 민군간의 대화합의 장을 마련하자는데 참뜻이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편집부).
1981년 1월 5일,[광주사태]가 발생한지 7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정국은 뒤숭숭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광주사태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고사하고
그로 인한 피해의 파악이나 보상 문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때여서 민심은 더
악화되어 가고 있을 즈음, 국방부 모처의 연구부서에 근무중이던 우리 팀에게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그것은 [광주사태] 직후의 뒤숭숭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조속히 연구하여 보고하라는 계엄사령부의 지시였다. 처음에는 명령처가 어딘지도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계엄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광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접해 보지 못했고, 현지에
가보지도 않은 우리에겐 참으로 풀어내기 힘든 과제였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일을 저지른 측에서 해법을 연구할 일이지 전혀 엉뚱한 곳에다 이 일을 시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추상같은 계엄사의 명령이라 거역하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라 우리팀은 연초부터 당혹과 초조감에 쫓기면서 연구에 몰두, 두 달
만에 겨우 초안을 제출, 81년 3월초에 팀장의 수정을 거쳐 계엄사로 넘어갔다. 그러나
제대로 보고서가 올라간 것은 4월이었으니 아마도 정부에서 5.18 일주년을 기하여
무언가 획기적인 대책을 취하려 했던 것 같다.
당시 비상계엄은 81년 1월 24일부로 해제되었지만, 잔무 처리
등으로 계엄사는 육군본부에 상당기간 부분적으로 존속해 있었다.
그후로도 서너 차례 수정을 거듭한 뒤에야 우리는 그 업무에서
손을 뗄 수가 있었는데, 마지막 수정본을 들고 팀장과 함께 찾아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모처의 냉랭했던 분위기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찌됐건 5개월 여의 고생 끝에 보고서를 제출한 후 나는 그
보고서에 대해서 까마득히 잊고 살았고, 80년 여름 군을 떠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당시 5공의 탄압이 서서히 막장에 도달하자
여기저기서 반정부운동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2대 국회에서는 야당의원들을
중심으로 [광주사태]의 진상 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동안 숨겨졌던
사실들이 하나 둘씩 밝혀지기 시작했으니 [광주사태청문회]는 그 크라이막스였다.
이러한 분위기 조성에 언론은 큰 힘이 되었다. 그동안 계엄사의
언론통제에 눌려 질식하던 언론, 권력에 순치되고 말았다고 국민의 외면을 사던 언론이
이제 정신을 차리고 국민의 부릅뜬 눈을 바로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과 당시 관여했던 사람들 특히 군인들의
기피로 유감스럽게도 [광주사태]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본다. 그 결과 진실 규명은 소홀히 하면서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는 말로
영령들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당시 광주문제와는 무관했었지만 군인이었다는 것만으로
죄의식 비슷한 것을 느끼면 살아온 나는 최근에 [광주사태]에 관한 몇가지 자료를
입수하였다. 그것은 당시 군부가 [광주사태]에 대해 어떤 인식과 대응을 했던가를
알려주는 비문으로 분류된 공식자료(이는 윤성민 국방부장관이 국회에서 발언한 내용의
모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민화위]의 <국민화합을 위한 건의(1988.2.23)>
중 ‘광주사태의 치유’라는 자료, 그리고 국회속기록, 당시 취재 기자들이 생생하게
현장에서 기록한 이야기(월간조선 85.7)들이었다.
이 네가지 자료는 [광주사태]의 본질 규명과 군의 정치개입
실상 파악, 그리고 현대사를 이해하는 자료로써 매우 유용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계엄사]가 육군본부의 이름으로 광주사태에 대한 군의 공식 기록으로 남긴 자료는
매우 의미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붙여 공개하고자 한다.
군부 공식보고서의 작성 경위와 이유
필자가 입수한 문건은 [騷擾 鎭壓과 그 敎訓] - 國內外 民亂,
暴動의 史的 考察, 光州事態의 綜合分析- 이라는 긴 부제가 달려있는 육군본부 발행(1981.6.5)
자료이다. 발행 당시에는 3급 비문이었지만 86년말에 평문화되어 각급 부대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하도록 지침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광주사태]에 대한 군의 공식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군 내부에서는 폐기되어 대부분 없어졌지만 80년대 중반, 언론
재판에 의해 군부가 매도당하기 시작하면서 군부의 정치실세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시기에 밖으로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이 자료를 새삼스럽게 끄집어내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군부의 [광주사태]에 대한 유일하게 체계화된 기본 자료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문건을 분석해보면 당시 군부가 어떻게 광주에 개입했으며, 어떤 작전개념으로
작전을 전개했는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확실히 알려주는 산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피해 상황은 많이 감추어져 있고,상당 부분 민간에게
전가되어 있어 부정확한 점이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군은 이런 자료를 펴냈을까. 참으로 궁굼한 일이다.
군부 실세(정치군인 집단)가 1981년 6월5일에 이 자료를 펴내게 된 동기를 유추해보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가 쉽게 떠 오른다.
첫째, 80.5.17.24:00 비상계엄 선포후 5.18부터 시작된 10일간의
광주지역 소요는 군부의 과잉 진압으로 인하여 국가 사회를 도리어 혼란에 빠뜨리고,
군이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이는 군의 실세들이 원치 않았던 사항이며,
그 사실을 사실대로 묵과할 경우 자신들이 역사의 심판과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임이 드러났다. 특히 진압군과 지휘 군부, 그리고 뒤를 이은 5공 정부의 정통성이
위협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광주사태] 1주년을 기하여 무언가 분명한 기록을 남기어
후세에 판단의 기준으로 삼게함은 물론,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하여 역사화하겠다는
의지가 강하였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급조한 사료가 이것이다.
둘째, 당시 군부 실세들은 기세가 충천하여 5공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만약 군이 [광주사태]의 가해자로 지목된다면 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고, 그리 된다면 향후 군부를 등에 업고 통치를 해야 할 全斗煥 정권으로서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일부 광주시민을 가해자로, 또 꺼림칙한 야당 정치인들을
하수인으로 몰아 함께 응징 단죄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고, 군부의
행동을 옹호하며 군부의 활동을 승전보로 기록해두는 것이 이롭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셋째, 향후 집권셰력의 강력한 통치패턴을 암시하는 것임과
동시에 기존의 관료 사회에 신 군부세력의 파워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예봉을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80년 9월 1일에 全斗煥씨가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데 따른 정치적 부담을 덜어보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고
분석된다.
이상과 같은 인식은 [국보위]시절의 강권 통치와 80.9.1부터
81.2.25까지의 11대 全斗煥 대통령 치하, 그리고 81.2.25일 이후의 7년 간의 5공
치하에서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위를 통하여 명백히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필자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계엄사)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이를 바로잡는 것이 앞으로 군과 국민 정치인 사이의 간격을
좁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군부자료를 분석, 시비를 가려 재정립하고자 한다. 필자의
구체적인 의도를 정리하면 이렇다.
(1) 군부의 공식 기록은 많은 부분이 잘못되어 있는데, 이를
방치할 경우 훗날 군의 공식적인 사료(史料)로 평가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광주민주화운동]의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군부의 기록을 공개함으로써 군에게
자체 수정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더 이상 군의 역사가 더럽혀지는 것을 막자는
의도이다.
(2) 당시 일부 정치군인과 그에 이용당한 군부대의 폭압이
빚어낸 사실 왜곡의 진면목을 국민에게 알려서 군이 다시는 국민에게 총을 대는 ‘불의의
폭력 집단’이 되지 않도록 군부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화운동 이후에 새로 생성되고 있는 군대문화가 무기력 무사명 무책임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선배들이 저지른 업(業)에 대한 보(報)로 생각하고,역사의 오기(誤記)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신세대 군인들의 청신한 근무자세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다.
또한 군 내부에서도 다수 장병들은 아직까지 [광주민주화운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상부 지시대로의 이해만 강요당해 왔는데, 이 역시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3)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정부나 국민이 분명히 민주화운동이자
의거(義擧)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러나 가해자측인 군에서는 여전히 폭동으로
주장하고(이를 호도하여 ‘사태’라고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 있는데, 어떻게 군이
정부나 국민의 평가와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가. 만약 ‘의거’라면 가해자측으로서는
커다란 국민적 보복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인가? 만약 4.19의거와 [광주민주화운동]이
같은 반열에 든다면 당시 진압군에게는 치명적인 결과가 돌아와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4.19는 ‘의거’로 즉각 규정되었기 때문에 발포명령자와 발포자
25명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광주사태’가 ‘의거’로 판명된다면 처벌 기준이
새롭게 서야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해서도 언제까지나 역사에
맡긴다는 핑게를 댈 것인가. 빠른 시일내에 명백한 평가와 대응이 있어야 할 줄 안다.
아울러 군의 공식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그 안에는 정치적
의도가 짙게 배어있어서 순수한 군의 ‘작전결과보고서’라기 보다는 <정세보고>
및 <국정운영 청사진>과 같은 색채를 띄고 있어 보고서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점이 많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군부의
기록이 전혀 사실 무근한 허위기록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79년,
80년 당시의 내외 정세가 국가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군부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인식되었고, 그로 인하여 군은 총칼로 내외의 도전을 제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것은 어떤 정권이든지 동일한 상황에 처한 경우에는 비슷한 대처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한계를 설명해 준다.
全斗換 대통령은 발0포 명령의 실체적 주인공
그러나 일부 지역의 치안혼란을 반란행위로 규정한 뒤 경찰과
위수군부대의 활동을 외면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무자비한 진압 행위를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대 국민 범죄행위이다.
군을 아는 사람이면 극히 상식적인 것이지만, 공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와는 달리 특수임무를 띄고 적 후방에 침투, 적진을 유린한 뒤 신속히 철수하거나
현지에 거점을 만들어 확대하는 특수부대이다. 따라서 광주지역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이다. 우리가 광주문제를 들먹이면서 발포명령자가 누구냐는
문제를 잡고 늘어지지만 이것은 우문 중의 우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군이 광주지역을 적지(敵地)로 판단했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적지에서 특수 임무부대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즉 투입부대에겐 이미 발포와 사살 등 모든 전투행동이 내려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적지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있어서 대항하는 세력은 이미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적일 뿐이다. 적을 살려 둘 군인이 어디 있겠는가.
침투지역에 있는 모든 인간을 적으로 간주하도록 훈련되어
있는 그들에게 죄를 묻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공수부대를 투입토록 명령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발포 사살을 명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가 과연 공수부대의 투입을 명령했을까.
80년 5월 이 나라를 움직인 실세는 누구인가. 군의 최고통수권자는
최규하 대통령이지만 당시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비상대권을 쥐고
흔들던 시기였으니 책임은 全 斗煥에게 있다. 즉 광주학살의 주범은 다름아닌 全
斗煥인 것이다. 그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고로 그는 실체가 애매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군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계엄사라는 합법 기관을 동원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또 자신의 통치기간 내내 군부의 후배들에게(특히 하나회출신) 돈과
명예 출세 등 갖은 혜택을 다 주어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놓았다.
군 수사기관이 작성한 「광주사태」 평가서
본 문건의 머리말에는 육군본부 軍史硏究室長의 인사말이 있지만,
그가 그 보고서의 발간인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군에서 군사연구실의
위치와 역할이라는 것이 특과감(特科監) 수준에도 못미친다는 점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이 문건의 인쇄 책임 정도만 졌을 뿐, 작성 및 보고 등은 특수 임무를
띤 TF(Task Force), 혹은 특수부대에서 작성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록의 작성처는 어디인가. 두가지 추리가 가능하다.
하나는 육본 계엄사 안의 연구팀(그 당시 군.경.검.기타 정부부서 파견자들이 모여
있었음)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12.12사태의 주역이자 [국보위]운영의 산실이었고,
5공 창출의 주역이었던 당시 [보안사령부]일 가능성이다. 이 중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 이유로서는 연구보고서의 서식과 용어의 사용 등을 볼 때, 5공 당시
실세였던 보안사의 보고서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체적인 작전 상황의 전개와 그 파악 요령 및 분석기법
등을 볼 때 작전분야보다도 다분히 정치색이 짙은 것으로 보아 광주에 진입했던 특전사
예하 부대와 20사단 31사단 등 군 부대의 조력을 받아 보안사가 주동이 되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보안사의 위력이 대단하여 교수와 학자들도 동원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실제로 5공 당시 보안사 내의 부서에는 특수연구팀 구성이
하나의 유행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군부의 의도적 시각에 의하여 정리된 까닭에 5.18 발생에
대한 배경 설명이 전무한 실정이다. 왜 5.18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원인
규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 의도가 군사작전과 혼재되어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비이성적인 표현이 많다. 즉 3공 4공의 폭압정치와 심한 지역차별, 그리고
12.12사건 이후 신 군부의 비민주적 정치 참여 등이 민주화의 저해요인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어 5.18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 새 시대의 개막을 염원하는 국민의 뜻에 반하여
또 다른 군사정권의 등장을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선상에서 [광주사태]를 이해하려들지
않고, 마치 김대중(金大中)과 그 일당들이(?) 주동이 되어 적색 제국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그에 부화뇌동한 반도(叛徒)들에 의해 자행된 반국가적 폭동으로 왜곡하고
있어 5.18 발생의 원인과 배경적 설명이 극히 미흡하였다.
그리고 5.18 발생 1년 만에, 구체적으로는 5공 출범 3개월여
만에 서둘러 충성 경쟁을 위해 정리한 까닭에 많은 논리적 모순과 상황 분석의 미흡이
눈에 띤다. 즉 5.18광주사태는 정부와 군부 등에는 일체의 잘못이 없다는 점을 강변하면서도
교훈을 도출하는 과정에서는 포괄적인 문제 제기 형식을 빌어 반성의 뜻을 비치기도
하였다. 아무튼 보고서의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계엄사 보고서의 광주사태 왜곡 실상
(1) 광주사태는 북한과 연계한 김대중 일당의 정치 책동에
불과하다.
당시 군의 북한정세 판단 근거를 보면, 북한의 불변하는 대남책동과
특히 10.26 이후 강화되고 있는 북한의 도발 징후를 지적하면서 북한이 남한내 선동의
주 대상으로 학생(44%) 근로자(24%)를 선정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그 근거를 밝히지
못하고 있어 신빙성이 적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내정세 분석 내용을 보면, 김대중
일당이 학생을 선동하여 대중을 규합한 뒤 민중 봉기를 유도하여 정부를 전복시킨
뒤 과도정부를 수립하고자 한다는 등식을 설정, 모든 것을 김대중에게 전가하고 있다.
즉 광주사태는 김대중 일당이 계획적으로 북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내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김대중 일당을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하는 반국가 사범으로 단정하면서
이러한 정치과열과 학원 소요는 노사분규를 대량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여기에
언론계와 종교계의 무분별한(언론인과 종교인들을 분별력이 모자란 층으로 여긴듯)
현실 비판과 사회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17 24:00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는 불가피하였음을 주장하였는데, 그 조치 중의 하나인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의 검거에 대해서는 ‘국민의 지탄 대상이기 때문에…’란 유치한 표현으로
발뺌하고 있다.
(2) 「광주민주화운동」은 폭도들의 소요(騷擾)이다. 무력으로
진압하라.
광주시민의 민주화항쟁을 폭도들이 소요를 일으켰고 그것이
폭동으로 발전한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은 다음과 같이
대응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1)기습적이고 민속한 행동 (2)지속적인 정보 판단 (3) 엄정한 군율의
준수 (4)퇴로를 개방한 군중의 해산 유도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폭도에 대한
작전은 해산에 있지 전멸(全滅)이 아니라는 군의 교범은 진압 현장에서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또한 폭도(?)를 해산시키는 방법과 순서로 (1) 소요현장에
출동 (2) 총검과 화력이 사용될 것이라는 암시로 강제 해산 유도 (3) 화학작용제의
사용 (4) 선발된 선수에게 사격을 시킴(명중 시위) (5)부대의 화력을 전면적으로
사용토록 지시하였다. 이것은 군이 광주시민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에 대응했던가를
여실히 입증해 주는 산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미국 최고재판소의 판례와 미국 각 주의 법률을 소개하면서
‘소요진압 작전시 군 명령에 순종한 부하의 행위는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소요 진압작전간 진압군의 해산명령에 불복한 방관자나 현장 집회자가 사상(死傷)되었다
해도 군인은 면책이며 정당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광주사태에서
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살상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복선이 깔린 표현이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이다.
한편, <지휘관의 기본적인 유의사항>에 적시해 놓은
사항들도 [광주사태] 진압시 얼마나 적용되었는지 냉정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
자료에는 지휘관이 진압현장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으로 (1) 소요는 초동단계에서
최단 시일내에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지휘관의 과도한 신중과 주저는 시기를
상실하여 피해를 많이 발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2) 병력의 투입은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한다 (3) 인명의 처형은 회피해야 한다 (4) 사유재산은 존중되어야 하고
공공재산은 보호해야 한다 (5) 발포에 앞서 폭도 해산에 진력하고,발포는 사전에
경고(예고)되어야 한다 (6) 출동 병력의 수와 진압작전의 결과는 필히 기록으로 남겨
차기 판단의 지표로 해야 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군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중립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허구였음이 증명되었다.
(3) 광주민주화운동이 <이시애의 난> <홍경래의 난>과
같다?
보고서 3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적(史的) 고찰 운운은 종국적으로
[광주사태]의 진압에 동원됐던 제 조치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 자료적
성격을 갖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의 인종폭동(1811), 일본의 조세법 개정반대 폭동(1876.12),일본의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 폭동(1960.1), 폴란드 반정부폭동(1970.12.12) 및 노동자파업(1980.7.1),
헝가리 반소의거(1956.10.23.-11.6), 남아공 흑인폭동(1976.6), 중공의 천안문사건(1976.4.4)
등을 예로 들면서 그와같은 군중의 봉기에 군이 어떻게 철저하게 대처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몇 년전 노태우(盧泰愚)씨가 광주사태 때 죽은 시민의 수는
중국 천안문사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여 국민의 지탄을 받은 바 있는데,
그의 그와같은 인식과 판단은 이미 광주사태 당시에 모든 정치군인들과 5공 정부의
공식 견해였던 것이다. 외국의 폭도들과 [광주사태] 시민군이 동질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자료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뒤에 제시한 <韓國史上 주요 소요사태>와
더불어 동류의 것으로 보는 시각을 표출하고 있다. <한국사상 주요 소요사태>로
꼽는 것을 보면, 李施愛의 난(1467.5),洪景來의 난(1811.12.18), 晋洲民亂(1862.2),
東學亂(1894), 광주학생사건(1929.11.3), 신의주학생반공의거사건(45.11.23) 등을
들고, 광주민주화항쟁을 이와 유사하거나 혹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 인식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일제 총독부를 포함한 치자계층의
시각에서 억압받던 한국민의 항거를 민란 내지 사건 쯤으로 낮게 평가한 것을 「광주민주화항쟁」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즉 민란과 항일의거, 반외세 투쟁, 민주화운동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극히 비 이성적인 접근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군과 정부의 잘못은 없다?
광주 소요사태에 대한 배경과 동기, 직접적 발단 원인, 경위
등 어느 부분을 보아도 정부나 군의 잘못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고서에는 호도되어
있다. 일명 충정작전(忠正作戰)이라 불리우는 광주지역에 대한 계엄군의 진주 및
질서회복 작전 상황을 보아도 군의 시각에서 본 작전 상황일지일뿐 자세한 전말이
나타나 있지 않고, 모두가 시민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충돌이요 피해일 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5.18.- 5.31까지 군이 광주지역에서 실시한 작전으로
인하여 적(폭도) 사살 10명, 생포 55명, 부상 32명 뿐이라는 통계에 접하고 나면
그 통계의 허구성에 할 말을 잃고 만다. 물론 부록에서 당시(80.6.25현재) 민간인
사망자가 162명, 부상자가 377명이라고 일부 밝히고는 있지만, 작전단계에서의 민간인
인명피해에 대한 통계가 대부분 허위로 기록된 반면, 군의 피해는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계엄사의 이러한 통계 미숙으로 인한 인명피해 시비가 그후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광주지역에 진주한 계엄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2군사령관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본 문건은 밝히고 있으면서도, 2군사령관의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밝히고 있지 않은데(전문 수발 통계 제외), 앞으로 이에 대한 사실적 활동내용도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5) 허구적인 교훈의 집대성
끝장에는 [광주사태]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치,군사적 제 교훈을
도출하여 훗날 참고로 삼고, 아울러 제 2의 동일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가용한 모든 의견들을 규합해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81년에 엮어놓은 이러한
교훈들, 특히 국가정책적 교훈들이 그 뒤에 제대로 정책에 반영되었다는 증거는 찾기가
힘들다. 그 근거로는 87년에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그것을 설명하고도 남는다.
이 말은 80년에 제기되었던 각종 문제점들을 국정운영에 제대로
반영하여 7년동안 시행했더라면 87년의 민주화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당시 보고서에 사회소요의 근본적 발생 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5공정부에 이렇게 건의하였다. (1)청렴 도의정치 (2)경제정책의 신뢰 회복
(3)국가기강 확립 (4)전인교육의 실시 (5)국민정신교육의 강화 (6)공직자 기강확립
(7)유언비어 대책 (8)노사분규와 실업대책 (9)지역감정 해소 노력 등에 대해서 자세히
제시하였지만, 보고서에는 수박겉핥기 식의 제목 나열에만 그쳐버렸고, 그 후 5공
정부가 전개한 정책적 노력이나 행정을 볼 때 이를 정책으로 옮겨 실천하려 했던
노력이 별무였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광주사태는 그동안 권위주의체제 안에서
상관의 눈치나 보고 아부해왔던 관료사회에 부분적이고도 강압적인 것이긴 하지만
철퇴를 가하여 각 분야에 쇄신의 기운을 마련해 놓았다.
특히 군사정책 면과 군사작전 측면에서는 군부가 깊은 자성을
하게 하고, 아울러 대응을 위한 방안들을 강구토록 해준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한편, 부록에 나타난 각종 피해통계와 계엄자료 문건은 당시
군의 실상과 입장을 설명해주는 요긴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80.9.17에 시작하여
81.1,23일에 끝난 金大中(이하 확정형:無期) 文益換(10년) 李文永(15년) 芮春浩(8년)
高銀泰(10년) 金相賢(7년) 李信範(9년) 趙誠宇(10년) 李海瓚(7년) 李錫杓(5년) 宋基元(7년)
薛勳(7년) 沈在哲(5년) 徐南同(2년6월) 金鍾完(4년) 韓勝憲(3년) 李海東(4년) 金允植(2년6월)
韓完相(2년6월) 兪仁浩(2년) 宋建鎬(2년) 李浩哲(3년6월) 李宅敦(2년) 金祿永(3년)
등의 [金大中사건 공판결과]와 80.10.25에 시작하여 81.3.31일애 끝난 鄭東年(무기)
裵龍柱(무기) 朴魯丁(무기) 朴南宣(20년) 金宗培(20년) 洪南淳(7년6월) 河永烈(20년)
尹再根(20년) 徐萬錫(20년) 鄭尙容(20년) 河圭晶(7년6월) 尹錫樓(20년) 등의 [광주소요사건
공판결과] 등의 자료는 군사작전 보고서에 포함될 성질의 자료가 아닌데도 실려있는
것을 보면 이 보고서의 정치적 색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金泳三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 백서]를
발표하라!
이제 광주민주화운동의 종결은 군부에서부터 맺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군의 자료가 이토록 허위로 가득차 있는한, 그것이
일종의 성공한 전사(戰史)로 자리잡고 있는 한, 광주문제는 정치적 미봉은 될지 몰라도
가해자인 군부는 영원히 아픈 가슴을 안고 죄의식에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이 더 이상 광주문제로 괴로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진정 군부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도 군부는 이제까지 정사(正史)로 여겨왔던
[계엄사]의 자료를 재 정리하여 진정한 민주군대로서 바른 역사를 남겨야 한다. 군사작전면에서
뿐 아니라 광주에서 전개한 제 활동을 적나라하게 재정리하여 역사화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해야 군의 잘잘못을 바르게 정립하여 역사 앞에 바로 설 수 있으며 민주군대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유사한 상황이 생길 때, 아니 머지않은 북한과의
민족 통합 과정에서 자칫 빚어질지도 모를 유사한 사태를 슬기롭게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군부가 ‘광주’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어야만 할 것인가. 냉정히 판단하여 기존의 사료를 진정한 정사(正史)로 재정리해야
한다.
아울러, 金泳三정부는 문민정부의 힘을 십분 이용하여 임기
내에 6공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의 건의 내용, 정부와 군, 민간 관련기관과 단체들의
자료를 집대성하여 [광주민주화운동 백서]를 펴내야 한다. 현 집권 세력이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한 결과 국민의 신임으로 집권하였고, [광주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시민항쟁
내지 의거로 평가하고 있는 정부이니만큼, 임기가 끝나기 전에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
평가를 끝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金泳三 문민정부에게 부과된 역사적인 과제이다.
광주 [망월동 묘지]의 성역화라든가 여러가지 부대 사업들도
이러한 조치가 있은 뒤에 이루어져야만 그 정당성이 보장되고 항구적인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앞으로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광주문제는 계속되는
아픔으로 우리의 가슴을 후빌 것이며, 그 후손들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게
될 것이다.
12·12 5·18 軍史 자료 수정 착수 ─ 국방부, 內亂 판결따라 ─ 국방부는 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대법원 상고심 재판 결과 당시 사건이 내란이라는
점이 인정됨에 따라 12·12와 5·18을 기술한 軍史(군사)자료 수정작업에 착수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18일 “당시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재판을 통해 확정된 만큼
군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면서 “국방부가 발간하거나
보유하고 있는 10여 종류의 책자와 문서상의 ‘광주사태’와 같은 표현 등을 고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군은 현 정부 출범 전까지 12·12를 군이 국난을 극복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다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5·18에 대해서는 ‘광주사태’로 못박아
계엄군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정훈교육 시간 등을 통해 홍보해 왔다. 국방부는 이에
따라 판결문과 군 상황일지, 검찰수사 기록 등 관련자료 등을 수집하고 軍史연표
등의 기존 자료들에 대한 재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다. 또 육군본부가 발간한 ‘계엄사’와
현재 총 3권으로 70년대 말까지만 기록된 國防史(국방사)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작전
내용과 그에 대한 평가 등을 새로 수록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