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선 칼럼    

고향 예찬    

素月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고 자연을 노래했다. 나도 두뫼산골 내 고향이 좋다. 그저 얕으막한 산자락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고, 마을 앞 신작로를 지나면 실개천이 흐르고, 계곡물을 막아 관개수로 활용하는 조그만 저수지가 있는 평범한 산골. 언제 어디서나 눈감으면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어릴 적 천진무구했던 동심들이 풋풋하게 살아나는 고향! 고향은 그냥 생각만 해도 좋다. 흰구름이 산마루를 한가로이 넘나들고 찬란한 태양이 大地를 살찌우면, 사람들 마음도 넉넉해져 살림은 곤궁해도 사람살기가 재미있던 시절,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옛날….

진달래 꽃술에 봄을 축복하고, 지붕위 하얀 박꽃에 별빛이 나리는 여름밤이면 반딧불이 춤을 추었고, 나즈막한 담장에 누런 호박이 익어가는 가을 들녘엔 허수아비가 감사 기도 드리고, 가시넝쿨에 종아리 긁혀가면서 산자락을 달리며 토끼몰이하던 함박눈 내리던 겨울날의 추억은 고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으로 달려가버린 쓸쓸한 길섶에 코스모스가 애련히 피었지만, 내 어릴 적 낭만은 이제 없다. 간간히 들려오는 이웃마을 예배당의 종소리도 서글퍼지지만, 닷새마다 열리는 장터의 정담들이 다소나마 옛 정취를 느끼게 해 주면서 나의 빈 마음을 달래준다.

아~ 북망길을 준비하는 늙은 할배의 앓는 소리가 된서리처럼 섬뜩한데, 사립 밖에 서 있는 이백년 넘은 은행나무는 인간의 희로애락엔 초연한 채 내년 봄의 새 삶을 예비하고 있다. 매미가 신나게 노래하던 숲속에, 술래잡기 하던 순이는 어느뫼서 행복히 살까? 그날 품었던 소년의 꿈은 어디로 갔을까! 고추잠자리보다 더 붉은 고추를 말리던 연노란 초가지붕은 음침한 회색 스레트로 변해버렸다.

늙은 농부의 한숨에 배어 있는 비애, 모든 것들이 퇴락해 가지만 장닭의 힘찬 날개짓에 멋모르고 꼬리치는 쌉쌀개의 시덥잖은 수작이 나를 유혹하는 고향! 어릴 적에 도시로의 유학을 위해 떠났던 고향! 이국땅 월남에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향수에 울던 고향! 삶의 터전을 전전하며 명절에만 찾아오던 고향엔, 어머니 아버지도 한줌 흙으로 누워 계시고 나는 木月의 나그네가 된다.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렇다! 인생은 세월의 나그네가 아니련가. 밀이 익고, 노을이 타고, 강나루도 건너고… 모깃불에 배어나는 구수한 감자냄새 옥수수냄새가 바로 고향냄새이다. 고향은 그리움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젖무덤이다. 삶의 원천이다. 그리고 세상 끝자리에 다다른 지친 나그네의 영원한 휴식처이다.   (<월남 정글에 흘러내리던 안개같은 저 고엽제는… > p286 노래 가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