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난 사람/ 신한국당‘도전2호’ 국회의원
최병렬
위기극복 국가혁신
대담·정리: 박정아 차장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에 사실상 마지막으로 합류한
최병렬 의원은 지난 5월 23일 지역구민들을 상대로 한 ‘경선출마 보고 대회’에서
색다른 출사표를 내놓았다. 그는 "나는 용이 아닌 소"라며 "권력을
누리려고 대통령 자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러 나왔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많은 분들이 나와 있지만 평시는 몰라도 지금 같은 난세에 나라를
맡을 만한 분은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가 난세에 필요한 국정 관리 경험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지난 85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끝으로 언론계 생활 26년을
마감하고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노태우 정부에서 청화대 정무수석.
문공부 장관. 공보처 장관. 노동부 장관, 김영삼 정부에서 서울시장을 지내는 등
장관급 자리만 네 곳을 거쳤다. 그는 그런 자리에 갈 때마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90년 공보처 장관 시절엔 KBS 노조가 당시 서기원 사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자 "대통령이 임명한 사장이 노조에 의해
ㅉ겨날 수는 없다"며 공권력을 투입했다. 또 온갖 루머와 압력에도 민방 설립을
추진, 우리나라에 민영 TV 시대를 열었다. 노동부 장관 시절에는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 "우리 임금 체계가 잘못돼 있다"며 총액임금제를 밀어붙였다. 이런
추진력과 돌파력은 94년 성수대교가 붕괴한 뒤 그가 서울시장에 임명됐을 때 여야
대변인이 나란히 "최적 인물"이란 논평을 발표한 데서 잘 드러났다. 그는
실제로 성수대교 붕괴로 불안에 떨던 서울 민심을 단기간에 안정시켜 ‘난전 시장
최병렬’이란 평판을 얻었다. 오래 전 방안을 마련 해놓고도 이곳저곳 눈치보느라
시행을 못하고 있던 버스 전용 차선제를 과감하게 도입했던 신한국당 ‘대권도전
2호’인 최병렬 의원을 이달에 만난 인물에서 찾아가 보았다.
Q: 신한국당 대선후보중 출마 선언은 두번째 이지만,
출진은 가장 늦었는데 뒤늦은 출진변을 말씀해 주십시오.
A: 작년까지만 해도 출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해들어 노동법 개정 파문과 한보사태가 발생하면서 경제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고, 정치는 엄청난 불신속에 방치되고 있으며, 북한은
언제 붕괴될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는 6.25이후의 최대의 위기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었지요. 이러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라 일을 해 본 풍부한 경험이 있고
그 과정에서 업무추진능력이 검증된 깨끗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언론계에 있을 때나 정부에 있을 때, 항상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으며 특히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일이 주어지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신과 추진력이 어느
정도 검증을 받았다고 생각되며 이렇게 출마를 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번에 당헌.
당규 개정을 통해 대의원 수가 1만3천명으로 늘어나 과거처럼 대의원들이 지구당
위원장들의 의중대로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 대의원들
대부분은 중소기업 운영가나 자영업자 들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정치. 경제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어 나라와 국민이 살 수 있는 길을 진지하게 모색할
것으로 봅니다.
Q: 최 의원님은 최틀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데
경선후보중 최고의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요.
A: 보수가 수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면 보수가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한 사회의 규범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보수지요. 남들처럼 인기만
생각하면 욕먹을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외부에 강한 이미지로 비추어진
것은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책의 결정과정에서는 무수히
생각하고 누구와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일단 결정된 일은 언제나 사표를
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추진해 왔습니다. 따라서 내가 일을 추진하는 모습만
본 사람들에게는 강한 이미지를 많이 남겼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일해 본 사람들은 내가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Q: 한국의 특수상황에는 안보문제가 대선주자로서 필수요건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언론인, 국회의원, 장관 경륜으로 특별히 군과의 경력사항이
없는데 최의원님의 국방, 안보관은?
A: 군과의 특별한 경력사항이 대선주자의 필수요건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보다는 국방, 안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원칙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북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일관된 기본 지침이 없이 혼란된 상황속에서
전개되어 왔으며, 북한 동포와 북한 정권을 혼동하는 정부의 정책구사는 국민을 불안케
하여 결과적으로 실망을 금치 못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대북 정책의 기본을
확실하게 정립하고, 이 바탕 위에서 질서있는 통일을 달성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미
국민의 합의로 천명된 자주 . 민주 . 평화의 3대 통일원칙에 충실할 것이며 통일은
제3자가 아닌 우리의 자주적 힘으로 북한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무력에
의하지 않은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Q: PK 박찬종 후보와, TK 이수성 후보와 비교해 PK출신으로서의
최의원님의 장점을 말씀해 주십시요.
A: 나는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의 패거리화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출마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도 한국정치의 가장 큰 병폐중의
하나인 패거리정치를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출신 지역을
근거로 한 장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바 없습니다.
Q: 3선의원으로 문공부장관, 공보처장관, 노동부장관,
서울시장 등 속칭 관운이 아주 좋은 편인데 특별한 원인이나 이유라도 있습니까?
A: 12대때 전국구의원을 한 것은 내 의사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떤 대가를 바라며 특정 조직을 찾은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윗분들이 필요할 때 나를 부른 것이라 생각하며, 그동안 많은 요직을 거치면서 단한번도
부정이나 비리에 연루된 적이 없이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공직생활을 해왔을
뿐입니다.
Q: 이력사항을 보면 서울대 재직기간이 8년이며,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 기자 재직사항도 재학기간에 겹치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또 최틀러란
닉네임은 왜 생겼습니까?
A: 대학 3학년때 친구 형님의 소개로 한국일보 견습기자
시험을 쳐서 합격했습니다. 당시 한국일보는 대졸학력을 문제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졸업이 늦어진 것은 재학중에 군에 입대했기 때문입니다. 최
틀러란 닉네임은 제가 조선일보 정치부장 시절 한 후배 기자로부터 '최틀러'(최의원
성에 히틀러의 '틀러'를 붙인 말)란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독선에 가까운 혹독하고
가혹한 지휘를 한 편집국장으로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강성'이란
평가가 따라 다니지만 정작 저는 그것을 장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마구잡이로 밀어 붙이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Q: 청조근정훈장을 받으셨는데 공적사항을 소개해 주십시요.
A: 청조근정훈장은 노동부장관 퇴임후 받은 것으로서
퇴임한 장관에게는 의례적으로 훈장을 수여합니다. 그래서 받았습니다.
Q: 3선 의정활동중, 입법활동에서 가장 자랑할 수 있는
업적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요.
A: 자랑할 만한 것이라기 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최근
동해안에 침투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우리 사병들이 방탄조끼를 착용하지 안은 채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보고 국방부 국정감사때 이를 정식으로 지적하여 이후에
장병들이 방탄조끼를 입고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했던일 같습니다. 최병렬 의원은
지리산 천왕봉 밑 벽촌인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뒷날 사화(士禍)에 휩쓸려 옥사한
13대 중시조 최영경(崔永慶) 선생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따라 낙향, 지리산
자락에 터잡은 그의 가문은 세속을 등지고 살아온 유명한 '지리산 48가(家)' 중 하나이다.
가난한 성장기를 거쳐 진주중. 부산고를 졸업하고 서울 법대 3학년 재학 때 한국일보
수습 기자로 입사, 조선일보로 옮겨 정치부장. 사회부장을 거쳐 42세에 편집국장을
맡아 4년간 재직한 뒤 85년 정계에 입문했다. 노태우 정부 초기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내면서 '5공 청산'을 적극 주장,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손볼 사람' 중 한 명으로
지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