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의 비무장지대 페루와 에콰도르 국경분쟁의
교훈


소령 이준철


   구소련 붕괴 이후 탈냉전의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옛 영화를
군사력에 의존 회복하려는 중국의 패권추구 양상과 노골적인 일본의 군비증강은 향후
국경을 주변 3대 강대국과 맞대고 있는 우리의 안보현실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중남미 하면 누구나 성하(盛夏)의 뜨거운 태양과 눈부신 해변의
삼바춤, 끝없이 펼쳐진 SELVA(JUNGLE) 등의 광활한 자연, 마야, 잉카의 찬란한 문화,
이에 반해 낙후된 경제 개발의 열기 등을 쉽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평화로운
상상 속에 그 누가 국경분쟁에 어우러진 전쟁의 역사와 현재의 분쟁상황을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비무장 지대’라는 용어는 반세기 동안 동족간의 분단과 군사적인
대치상황의 긴장을 안고 있는 우리의 전유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필자가
공부하고 있는 이곳 페루에서도 에콰도르와의 국경분쟁에 따라 오늘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비무장 지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향후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의 안보관을 재조명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념과 사상이 다른 체제 아래서 세계 유일의 냉전지대의 대한민국,
이 한반도의 냉전의 시대가 이미 반세기를 넘고 있지만 호전적인 북괴와 대치하고
있는 긴장감의 현실은 아직도 예측하기 어렵기만 하다. 그 두터웠던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 것처럼 언젠가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버릴 그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비록 이념전은
아니지만 우리와 유사하게 다수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영토분쟁을 거듭해오고 있던
페루가 1995년 1월 에콰도르와의 분쟁 이후 그동안 없었던 국경내 양국간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고 국제 감시단의 통제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영원히
양보할 수 없는 두 나라의 이해 관계 속에서 또 다른 분쟁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페루와 에콰도르 국경 분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짚어봄으로써 영토 문제가
국가간 분쟁의 도화선이 될 우려가 가장 높은 동북아 안보상황에서 우리가 당면하게
될 통일 한국의 영토분쟁 가능성에 대해서 사전에 많은 준비와 대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분쟁의 깊은 골


   1995년 1월 에콰도르는 페루 영토를 침범하였다. 세계의 언론은
‘걸프전’ 이후 또 다른 영토분쟁에 따른 전쟁의 위기를 우려하였으나,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없는 서방국가는 ‘걸프전’ 때와는 달리 큰 비중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필자 또한 TV 또는 일간지 상에서 해외 관련기사 정도로만 생각하고 간과하였으나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양국간으로서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위기의 상황으로
인식하고, 또한 대처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과 분쟁은 그 당사자들의 고통과
절박한 위기인 것이지 뚜렷한 관련이 없는 제3국의 입장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인
것이리라. 따라서 유사시 자주국방의 능력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페루와 에콰도르 분쟁은 영원히 양보할 수 없는 두 나라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또 다른 분쟁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곳 페루 지참대에 입교한
지 일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당시로서는 언어 소통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인지라
다음날 수업은 의식행사로 대치한다는 훈육관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의식행사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행사는 페루국가를 부르는 것을 선두로
하여 결의문 낭독, 고인에 대한 묵념(에콰도르 분쟁 당시 전사한 지참대 학생장교들),
분쟁 당시 기록영화 시청 등 학교장이 주관하는 가운데 상당히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행사가 바로 에콰도르군의 침공에 대한 규탄 및 전의 고양행사였던
것이다. 반대로 에콰도르 역시 페루에 대한 국민 감정은 영토 회복 실패와 협상에서의
소극적 대응 등이 전직 대통령(Bucaran) 실각의 한 요인으로 작용되어 대정부 투쟁으로
이어지는 등 격앙되어 있어 쉽사리 두 나라가 가까와질 수 없는 깊은 감정의 골을
느낄 수 있었다.


   페루와 에콰도르 두 나라 사이에는 두 가지 논리가 성립되어
있는데, 규정의 준수와 정치적 목적에 따른 행위의 시행(분쟁) 바로 그것이다. 이를
볼 때 아직 이 두 가지의 관점에서 페루의 입장은 국제관계법과 현재의 주변정세
속에서 역사의 흐름에 잘 따르고 있는 규정적 입장이었다(한편으로는 과거 페루가
에콰도르 영토를 군사력으로 흡수했다는 주장도 있음). 반면 95년 1월 에콰도르의
페루 영토 침공은 국경선이 모호한 지역의 국경을 확정 실리를 얻으려는 의도였다.


   분쟁(Conflicto)이란 지구상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내고
사회적인 현상을 변화시킨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분쟁은 항시 발생가능할 소지가
있고 분쟁 후 상호간은 서로의 이익과 정의를 주장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게 된다. 클라우제 비츠는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책수행의 계속에 불과하다’는 말 속에 전쟁(군사력의
사용)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정책수행의 수단으로 정의하였다. 즉 국가간의
외교정책의 실패는 결국 군사력에 의한 힘의 우위로 국가이익을 강요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기에도 역시 에콰도르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분쟁을 합리화하였고
그들의 권리를 폭넓게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분쟁을 통해서 엄청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실리를 주장함으로써 아마존강으로부터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확실한 우위를 실현 가능케 하려 한 것이다.


   양국 국경선 분쟁은 55년 동안 지속되어온 것으로 에콰도르,
페루 양국가의 최대 관심사항이었다. 양국 군사 최고 책임자인 합참의장단이 군사회담을
끼또(에콰도르 수도)와 페루 리마에서 개최하였으며 현재에도 외무계통을 통한 회담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다. 95년 3월 6일 브라질에서 양국의 외상 및 ‘리오의정서’
보장국 4개국 대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양국의 입장에 따른 국경 미합의 지점 목록
교환이 있었으나 계속적으로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개운치 못한 여운만 남기게
된다.


   분쟁의 원인 / 역사


   1. 분쟁의 원인


   가. 페루측 의견 북부 콘도르 산맥의 Cenepa강 상류(1995년
1월 국경분쟁 지역)까지 페루의 영토로 편입.


   나. 에콰도르측 의견 콘돌산맥 지역의 경우 국경선 설정 기본
합의 문서인 ‘리오의정서’에 명시되었던 강 사모라(Zamora)와 산띠아고강(Santiago)
간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국경선을 설정하는 것과 강의 중간을 횡단하는
국경선은 잘못이므로 나뽀(Napo), 야수미(Yasumi), 아구아 리꼬(Agua Rico)지역과
수르미야(Zurumilla) 수로지역으로 국경선을 확정하여야 한다고 분쟁 발생 지역을
자국이 영토에 편입.


   다. 에콰도르측 의견에 따른 페루측의 분석과 전망


   에콰도르 정부가 마라뇽(Maranon)강을 경유, 아마존강으로
진출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의도이며 어떠한 법률적 근거나
역사적인 뒷받침이 없는 것으로 절대로 용인할 수 없으며 이는 ‘리오의정서’가
국제법 테두리 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기에 에콰도르 정부는 전적으로 그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고 주장, 이에 대해 에콰도르측은 과거 1941년과 1981년의 군사적
승리를 근간으로 영토 문제를 정치적 군사적 분쟁으로 유도, 사태를 해결하려 희망하나
문제의 경계선 표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로 에콰도르 군부는 1994년 12월에
육군참모총장이 발언한 ‘태평양 시대인 2000년에는 실지를 회복한다’라는 일관된
고정관념으로 아마존 지역을 반드시 회복한다는 분위기 속에 추후 새로운 문제의
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2. 분쟁의 역사 / 문제점


   가. 1810년 - 1822년


   현 에콰도르 수도인 끼또는 16세기경 페루의 일부였으나 17세기
경에 독립하여 1803년 페루 영토에서 분리된 이후 에콰도르는 한 국가의 형태로 성장하고
1832년에는 에콰도르는 모든 관할구와 부속마을을 자기 국가에 통합하면서 페루의
북부지역인 Tumbe, Miyanas지역의 소유를 주장, 아마존 지역의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페루와 분쟁을 유발.


   나. 1937년 - 1941년


   에콰도르는 1937년 사루미야 지역의 불법침입을 시작으로 1941년에는
수개월간의 전투 실시.


   다. 1942년 - 1943년


   분쟁의 심화 결과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4개국의
중재하에 ‘리오의정서’에 서명 이후 협정서에 의거 양국 국경간 90%의 경계표시
설치. 그러나 국경표식이 어려운 콘돌산맥 일대의 78Km는 상호이해관계의 상반으로
인해 국경선 미설치(에콰도르측은 식별이 용이한 지형지물에 설치하자고 주장하고
페루측은 ‘리오의정서’에 의거 획일적 분할 주장).


   라. 1947년


   에콰도르 대통령 갈로 플라사는 ‘리오의정서’는 불평등하므로
이행할 수 없다는 성명발표.


   마. 1960년


   에콰도르 대통령 벨라스코는 ‘리오의정서’는 무효라 주장.


   바. 1980년


   에콰도르 대통령 오스왈도 우르타도는 ‘페루는 자국의 영토가
아닌 지역에 대해서 에콰도르측에 당연히 반환하여야 한다’고 하고 ‘리오의정서’는
결국 무효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


   사. 1981년 - 1984년


   에콰도르는 81년에 페루국경을 재침공하고 84년에는 페루군
국경기지 습격실시.


   아. 1985년 - 1988년


   1985년 대통령 레이온은 실지는 반드시 회복해야만 한다는
대국민 강연실시 이후 88년에는 대통령 로드리고 보오르하가 양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아마존 지역을 미래의 에콰도르를 위해 페루는 양보하여야 한다고 주장.


   자. 1991년


   에콰도르군은 쿠투마사, 붐부아사 지역의 페루군 경계초소
및 전방지역을 점령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므로써 국경분쟁 발생(페루군 협상으로
에콰도르에게 양보).


   차. 1994년


   에콰도르 육군참모총장은 그의 발언을 통해, 우리는 14년 동안이나
실지 회복을 노력해 왔으며 2000년대에는 반드시 실지를 회복한다고 주장.


   카. 1995년


   95년 1월 9일 에콰도르군은 국경분쟁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행동으로 분쟁발생 중재국 중재를 통해 1월 17일 브라질의 이말타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군사 감시지역 설치 및 미국 주도하에 군사 감시단
구성(Mompe).


   이상과 같이 영토로 인한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문제의 78㎞의 지점이 국경선 설치에 어려움이 많은 반면에 그 이면에는 그 지역에
막대한 지하자원과 특히 석유의 매장관계 때문이다. 아무튼 총 1,600㎞의 국경선
중에서 문제의 거리는 78Km이다.


   3. 경과


   가. 비무장 지대의 설치


   1995년 7월 양국은 양측동의 동등한 조건하에 비무장 지대를
설정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비무장지대는 총 528㎞(페루 영토:226.64㎢, 에콰도르:
261.36㎢)로서 동년 8월 1일 자정을 기해 그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 비무장 지대는
지상과 공중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 지역내에서 어떠한 일체의 군사활동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 평화를 위한 회담


   비무장 지대를 결정하기 위하여 두 차례에 걸친 회담결과 양측이
주장하는 내용은 페루측은 ‘리오의정서’와 95년 11월 20일 최종합의한 사항에 의거
콘돌산맥의 경계와 게피강을 연하는 선으로 국경을 확정, 에콰도르측은 ‘리오의정서’는
무효이며 따라서 아마존 지역의 에콰도르인에 대해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고 모든
국경선은 하천을 경계로 재설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므로써 ‘리오의정서’에는 기초를
두고 있으나 양국은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고, 에콰도르는 계속적으로 마라뇽 지역과
사루미야 도서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이 지역을 그들의 땅으로 포함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의도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막대한 지하자원 확보를 위해 양국이 팽팽한
대결을 보이고 있어 현재 계속되는 협상에도 불구하고 쉽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분석


   1952년부터 에콰도르는 약 10%의 국경선에 경계표시가 없는
것을 구실로 지속적인 문제를 삼아 왔다. 또한 ‘리오의정서’의 효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이행하지 않고 항의를 계속함으로써, 중재국에 압력을 가해 영토분쟁에 국제단체에서
적극성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내부적인 문제로 에콰도르 정부는 군을
통제·통수할 만한 통제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군부는 많은 금융기관과 정유공장
등의 자산보유 등 풍부한 재정능력을 갖고 있어 정부의 통제력 내에서 벗어나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부는 그들의 수입이 국가로부터 박탈되지 않도록
의도적인 분쟁을 유도하는 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정부와 군부는 제각기
내부적 갈등을(경제적, 정치적) 외부로 분출, 해소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며 정부 또한
군부와의 보이지 않는 밀약으로 군이 페루 영토의 침범과 적대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1942년 ‘리오의정서’와 ‘이타라마띠 협정서’를
기초로 보면 결과는 명확하다. 에콰도르는 마라뇽 아마존 지역을 자기들이 이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왕래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의 정치적인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으며 페루측에서는 이를 거부, 명확한 국경선 설치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 ‘리오의정서’에 의해 아마존 지역이 페루측에 고정되어
있어 종국에는 페루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고 에콰도르측은 실질적인 면에서는
불공평한 측면도 없지 않다. 현재 상호간 외형적으로는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군
수뇌부가 내왕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양국이 ‘지정학적
영토확장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에콰도르는 국제적인 여론을 유리하게
하면서 군사장비 도입 등 재침공의 기회를 노리면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고,
페루 또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한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아 언제 어디서 분쟁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일련의 분쟁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국토가 분할되어져 있는 오늘의 현실과 훗날
주변국들과 당면하게 될 국경분쟁의 소지가 다분히 있는 우리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미래를 대비한 차근차근한 준비가 오늘에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영토분쟁과 동북아시아의 안보상황


   인류는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수많은 전쟁과 분쟁의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전쟁을 통해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대부분이 예외없이 영토, 자원
등을 포함하는 경제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은 생존경쟁의 한 수단이었으며
국가간의 협상제한시는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통하여 상대국에 자국의 의지를
강요하여 왔던 것이다. 이러한 분쟁이나 전쟁의 원인은 이데올로기, 종교, 종족,
영토문제 등 다양하나 가장 현실적인 이슈로 부각되어진 것은 바로 영토분쟁에 의한
전쟁발생이 타원인에 우선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고대의 전쟁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및 현대에 들어와서도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데 제1차, 2차 세계대전 또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의 패권다툼으로 볼 수 있으며 70년대 중·소 국경분쟁, 80년대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등도 결국은 영토문제나
석유라는 자원확보를 위한 분쟁이었다. 또한 소련 붕괴 이후 소련연방국가 해체간
종교 민족분쟁도 존재하였으나 유고 내전 등 다수의 분쟁상황은 국경선 확정문제가
상당한 비중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90년 중반 이후 동북아시아에서만 하더라도 소련의 약화된
힘의 공백은 일본과 중국의 경쟁적인 군비증강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이로써 야기된
제문제점 중 영토분쟁에 관련된 긴장감이 한층 증대되고 있다. 즉 일본과 러시아의
북해도서 영유권 문제,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의 남사군도 서사군도 영유권 분쟁,
중국과 일본의 釣魚島 영유권분쟁, 특히 일본과 우리의 독도영유권 분쟁 등은 경제수역
선포 이후 해상영토 확장 등과 관련하여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토분쟁 문제의 심각성은 이의 해결이 시간이 경과하여감에 따라
국가간 군사력의 우위에 의해 해결되어질 가능성의 증대인 것이다. 과거 구소련 존재
시절 일본은 감히 북해도서의 영유권 문제를 공식적인 문제화하지 못하였고 중국과의
남방도서의 문제에 있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노골적으로
분쟁화하고 있으니 이의 이면에는 날로 군사대국화해가고 있는 일본의 군사력이 바탕이
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본의 군사 대국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한 일본의 군대는 연합국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어 최소의 치안 병력만을 유지하다가, 6·25 발발 후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50년 7월 7만5천명 규모의 경찰예비대가 조직되고, 52년 해상 자위대의 전신인
해상경비대가 창설, 오늘의 일본자위대의 모체가 되었다. 그후 일본은 괴멸되었던
국력이 회복되자 보수 세력들을 중심으로 국방력 재건에 주력하여 1954년 6월 2일
일본자위대를 창설하였다. 이러한 경찰조직의 자위대가 오늘날은 24만여 명의 병력과
조기 경보기를 포함 최신예 전투기를 보유한 항공자위대, 대양작전이 가능토록 편성된
막강한 해상자위대를 조직하였다. 일본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방위비를 투입,
지속적으로 최첨단 과학무기로 무장하였으며 1986년에는 ‘일본의 방위비는 GNP의
1% 이내로 제한’한다고 명시한 방위대강을 철폐하여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군사력에
투입 가능하게 했고 오늘날에는 헌법까지도 수정하여 일본자위대의 해외파병까지도
실시하였다. 방위개념 또한 전수방어 개념에서 탈피하여 전역미사일 방어 체계(TMD)
능력을 확보하고 또한 자체 정보수집 능력 강화를 위해 미국의 국방정보국(DIA)과
유사한 국방정보 본부(DIH)를 97년 1월에 설립함으로써 위성을 통한 정보수집, 정보교환
능력을 보유하여 독자적으로 극동 정세에 대응 가능토록 노력하고 있다. 특히 일본해상
자위대의 대형화에 따른 위협은 모든 자원 수송을 해상통로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동남, 북아지역에서의 중국의 패권추구


   과거 소련과의 군사적 경쟁관계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중국이 소련붕괴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패권회복을 위해 일본과의 경쟁적인
군비경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최근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무관하지 않으며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또한 상당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그 예로 95년 말 대만해협
사태시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대만침공 훈련을 실시하였고 구 소련연방
국가에서 최신장비 도입 등 군사력의 급속한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막강한
군사력은 대치관계에 있는 대만뿐만 아니라 과거 중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등 남방국가와 경쟁관계에 있는 일본에게도 큰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으며 한반도의 안보상황과도 절대로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군비경쟁 양상과 극동에서 러시아의 자존심 회복 노력 등은 우리의 향후 장기
국방정책 수립에 고려하여야 될 중요한 사안이다.


   우리의 영토문제


   가.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문제


   얼마 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독도문제 해결을 자민당이 선거공약으로
내건 사실과 현재 일본이 역사적, 지리적으로 분명한 우리의 땅 독도를 자기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이렇듯 과거
군국주의 망상에 젖어 끊임없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 자체의
옛 기록문서나 영국, 프랑스 등 옛 지도에 독도는 엄연히 한국의 땅이라는 사실이
다각적으로 입증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러시아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 발간한 조선동해안
지도에서 울릉도 독도가 한국 영토로 기록된 자료가 발견되어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1913년 일본 문부성이 발행한 지리 교과서에서도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한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자국의 영토로
편입을 주장하고 있는 저의는 독도 일대를 일본 영해로 확장시켜서 해군력을 한국
근해로 확대시키는 동시에 독도의 황금어장을 확보하겠다는 군사·경제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도를 떠 있는 해상 전초기지로 활용하여 동해안에서 해상패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듯 영토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이러한 자세로 도전해 온다면
우리는 실지 회복 차원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대마도는 <동국
여지 승람>에 우리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저명한 지리학자인 요시다
토꼬(1864-1918)의 저술 <일한 고단>에서 대마도가 신라 영토임을 시인하고
그 지맥이 한반도에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대마도에는 현재까지도 가야,
신라시대의 문화유적과 성터 우리의 풍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대마도는 우리의 영토임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도문제가 협상으로
거론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나. 중국과의 백두산, 간도지역 영토 문제


   ● 백두산 지역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모든 정기와 기상의 분출점임으로서
우리는 늘 그 기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백두산 천지 12 봉우리
중 절반 이상이 장백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영토에 편입되어 있고, 백두산 지역
개발의 대부분이 중국에 의해 주도되어 귀중한 우리의 정신적 자산과 물질적 자원이
지금 이 시간에도 중국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미공군의 군사작전 지도에서도 백두산 일대 전체가 중국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어 향후 이에 따른 영토분쟁은 불씨가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우려가 아닐
수 없다.


   ● 만주, 간도지역의 문제점


   과거 민족의 번영기였던 쥬신 제국시절에는 중국의 대부분을
우리의 조상들이 통치하였으며 고구려, 백제, 가야의 전성기 시대에는 동북아시아의
대부분과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 열도를 경영하였고 러시아의 일부인 연해주 일대도
고대 발해 대국의 성터와 많은 유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집안(集安) 지역에는 고구려의
수많은 유적이 산재되어 있고 고분군만도 70여 곳에 일만이천기 이상의 고구려 왕조의
분묘가 있으며 그중 동방의 피라밋이라고까지 불리는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환도 산성, 오회분 4호 묘 등이 있는 귀중한 예술적 문화
유산 등은 우리 민족의 산 역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잃어버린 옛 땅 연길(간도 지방)까지의 300㎞의 대평원, 용정일대의 기름진 옥토인
이 땅은 60% 이상의 우리 민족이 살고 있고, 중국 정부는 ‘朝鮮簇 自治州’라는
행정구역을 설정, 길림성 관리하에 두고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이나
민족성,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족이며 모든 지명이 한글로
되어 있고 간판, 서적 또한 한글로 표시하게끔 되어 있고, 두메산골 어디를 가든지
간에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분명히 간도 지역은 우리의
영토요 우리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한국과 중국의 국경은 현재 대부분의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
- 두만강을 연하는 선이 아니다. 이는 일본식민지 시절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한 淸·日간의
상호 국경선 협정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외세끼리 남의 나라의 국경선을 상호이익에
의거 확정하였으며 청나라는 이로써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묵인하였고 일본은 그
반대 급부로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따냈던 것이다. 그리고 일·러 전쟁후(1904-1905)
포츠마스(Portsmouth)조약으로 이를 확정해 버렸다.


   우리의 북방강역이 외세의 조약에 의해 두만강에서 잘려진
후 90여년 동안 압록강 두만강선이 우리의 국경인양 되어버렸던 것이다.


   만약 광복 이후 우리의 국토가 분단되지만 않았다면 합법적인
대한민국 요청에 의해 국제법에 따라 식민지 통치시절 이전의 우리 영토는 분명히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역사적 공식적인 朝·淸간의 국경선 협정은 1712년
5월 15일에 백두산 정상 동남방 4㎞해발 2000m 지점에 세워진 정계비에 기록되어
있다.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의 분수령 위에 이 비를 세우다’(旨査邊至,
此審視西, 鴨綠江, 東爲土門故於 分水嶺上, 勤石爲記). 결국 이 비석으로 볼 때 우리의
국경은 土門江 - 松花江 - 黑龍江으로 朝·淸 국경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토문강은
백두산 지역 북부 북만주에서 송화강과 갈리는 분수령 지역에 위치한 강이다.


   그러나 이 정계비가 백두산에 있는 이유는 조·청 사신이 경계선
설치시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의역하여 백두산의 두만강 분수령에 설치하였음). 또한
로마 바티칸 政廳에서 한국의 카톨릭 선교구는 대구, 경성, 원산의 3교구로 나누고
원산교구는 함경도 - 간도성 - 흑룡강성으로 표시하여 이 지역을 조선측 영토로 인정한
<한국 천주교>라는 책에 실린 지도(1924년 불란서 파리 소시에떼, 데미용 엑뜨랑제
刊)에 명시되어 있다. 현재의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는 조선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선
지역수복이 국토의 완성으로 보고 있고 우리의 헌법 제3조에도 ‘한반도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분명 우리가 반도인이
아니라는 자아확인을 하는 역사와 이를 증명하는 근거마저도 부인하고 일본 식민사관의
옹졸한 ‘반도사관’을 그대로 인정하는 망국의 기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감한 역사의식의 전환 속에서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협정되고, 역사적 근거없는 청일간의 국경조약을 무효로 선언하고, 우리의
동포가 현재 살고 있고 민족의 문화유산이 엄연히 존재해 있는 두만강 이북지역의
분명한 주인임을 통일 한국 이후에는 당당히 주장하여야 될 것이다.


   맺는 말


   우리나라는 옛부터 대륙 기마 민족으로서 중국으로부터는 ‘해동의
나라’라고 불리어지던 동경의 땅이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부터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고
5천년 이래 만주 벌판과 한반도 안에 정착,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으며 바다
건너 일본 땅에 들어가 삶의 터를 닦아놓고 정치·경제·문화의 기틀을 전파해 주기도
했던 위대한 東夷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1세기 전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놓여 대륙의 땅을 잃어 버렸고, 비록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미·소 양대 진영의
냉전현장으로 등장하면서 강요된 분단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폐허 속에서 오늘을 이룩한 우리 민족,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과거의 영광이나 잘못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 돌이켜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우리 민족은 번영과 전진을 위한 새로운 시대 전략과 비젼을
구상하여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강력한 군사력하에 지혜롭게 국가를 경영하였을
때는 전술한 대로 대륙의 동쪽에서 한반도를 거쳐 대마도는 물론 왜국(倭國)을 통제하였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중국의 감숙성(甘肅省) 서부지역까지도 평정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국력과 민족정신이 쇠퇴하였을 때에는 도리어 이들에 의해 온갖 재난을 초래하고
국토를 유린당하는 쓰디쓴 고배를 마시게 되었었다.


   최근 중국 해방군은 대만, 중국 남방지역에서의 위협증가 뿐만
아니라 그 작전 범위를 백두산과 흑룡강, 요동반도 이남까지 광범위하게 확대해 나가고
있고(97. 1. 13, 중국 해방군 기관지), 일본은 계속적으로 독도를 비롯한 도서영유권
분쟁을 유발하고 있으며 우익의 득세로 교과서 문제, 고위관료들의 한반도 지배의
정당성 주장 등 망언을 통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어 향후 국가 안보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통일 이후 이들과 영토 문제로 반드시 한번은 어떤 형태이든지간에
힘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전략 없는 국가는 패망하고, 비젼이 없는 인생은 몰락한다.’
우리의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 역사의 증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2000년
전 나라를 잃었던 유태민족은 세계도처로 생존을 위해 흩어져 살면서도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노력하여, 1946년 지금의 시온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는 유태민족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자기들의 고난사와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 과거에는
자기들의 땅이었고 언젠가는 다시 찾아야 될 땅임을 입에서 입으로 과거의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강조하고 또 교육시켜 왔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즉 하늘은 자구하는 자에게 주고자 하는 바를 주는 것이다.
또한 아랍 강대국 속에서 이스라엘이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끈질긴 저항 의식
속에서 강력한 군사력의 유지로 힘의 우의를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2000년 전에 잃어버린 자기의 영토를 찾았다. 하물며 우리가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잃어버린 지는 천년이 갓 넘었으며, 청일 조약에 의해 잃어버린 만주와 간도지역은
9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도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국력 배양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잃어버린 고토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륙과
삼면의 바다로 뻗어나갈 수 있는 혜택받은 땅에 살고 있다. 힘있는 국가만이 살아갈
수 있으며 세계사에 기록될 수 있다는 대명제하에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여 세계
속에 우뚝서는 우리를 만들어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