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庭 나들이 본대로, 느낀대로
安 贊 鎬
육사 5기
전 일본 공사
전 스위스, 브라질 대사
나는 15년 만에 故國을 찾게 되었다. 오랜 外地生活 탓인지
우리 固有의 美(그것이 자연이건 문화재이건)에 대해 쌓여 온 오랜 갈증을 조금이라도
메워 볼 생각을 가지고 떠나게 되었다.
가을과 봄 두차례 머무는 동안 대부분을 지방 각지의 史蹟,
寺刹, 文化財, 名勝地, 淸流溪谷을 찾아 다녔다. 첫번 느낀 것이 산야의 푸름이었다.
어딜 가나 푸른 숲으로 덮어져 있어서 마음이 넉넉하고 상쾌하였다. 6.25동란 직후의
빨간 산들이 푸르게 변모한 것이다. 北韓과의 대조에서 완전히 역전한 것이다. 金日成은
경지면적의 極大化라는 단순한 판단으로 北韓 산야를 다락밭 만들기(階段式 田畓
造成)를 敎示한 이후 산야는 헐벗고 雨期에는 작고 큰 강들이 土砂로 파묻혀 버리게
되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정부의 강력한 녹화정책도 있었거니와 경제발전의
波及效果로 일반 땔감을 산야에 가서 구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지방 고속버스 시대의 도래인 것이다. 어느 중소도시를
가나 고속버스 정거장에는 주변 중소도시로 가는 버스가 각 출발구에 정연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시간도 잘 엄수되고 있었다.
이들 터미널의 절반 정도는 자동판매기로 승차권을 구입하게
되어 있었고, 이것은 地方自治制의 실현과 효과적인 행정에 비해 훨씬 앞선 느낌이다.
서울 近郊에만 아파트가 많은 줄 알았는데 여행 다니는 어느
중소도시도 아파트 많기는 마찬가지로 내가 在軍시절 살던 原州와 光州를 방문한
기회에 내가 살던 곳을 찾아 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과히 한국은 아파트의 나라라고
할 만하다.
나의 나들이 목적의 하나인 절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한국의
사찰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를 통하여 王室의 비호 아래 번성함으로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특색을 지닌 우리 고유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護國泰安, 悲願成就, 極樂還生을 기원하는 곳이었고, 李氏조선의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민대중의 슬픔과 기쁨을 같이하여 오랜동안 마음의
依據地 역할을 해온 곳이다.
절! 그곳에는 고요함이 있고, 포근히 감싸주는 자비가 있다.
목탁과 독경소리 새소리와 풍경소리는 메마른 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心琴을 촉촉히
적셔 주며 어릴 때 느끼던 아늑함과 너그러움이 있다. 절의 중심인 대웅전은 절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는 곳이며, 이것이 국보급이나 보물급이면 그 지정된 유래를
알아보고 나름대로 감상하며 다니는 것은 門外漢인 나로서도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가을 석양의 햇살을 받으며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석탑은 孤寂感을 느끼게 하며 사뿐히
하늘을 향해 낡은 丹靑을 입고 뻗어있는 처마와 당그랗게 매달린 風磬너머로 보이는
창공은 넓고 속세의 티끌을 깨끗이 씻어주는 듯 아름답기만 하다. 절 주변의 山水지형과
경내로 들어가는 접근로의 감상도 절을 찾는 이에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寺刹은 예외 없이 소위 風水說의 明堂자리로 名山 기슭에
자리잡아 그윽한 山氣속에 감싸여 세워져 있어서 占地의 妙를 얻고 있음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이다.
또한 1500년 동안을 우리나라 정신문화를 주도해 온 佛敎伽藍에는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나의 宗敎와 관계없이
나는 절을 찾는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고 동경했던 절은 어디로 갔는가? 외형적으로는
衆生濟度보다 時勢에 따라 理財에 급급하는 사찰로 전락해가는 느낌이 든다. 修德寺의
경우를 보면 사계의 연구 결과 百濟 27대 威德王 때 창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古刹이다.
이 절은 우리들에게는 고려 때 건축된 大雄殿과 벽화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禪宗의 중흥을 일으킨 滿空스님의 駐錫處로 유명하며 근래에는
金一葉 스님의 계시던 곳이기도 하고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로 지정돼 있는 名刹이다.
이런 유서 깊고 성스런 곳을 가보라. 寺刹 입구의 빽빽이 들어찬
매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밑에 첩첩이 세워진 음식점에서는 대성방가로 춤추며
취중 언쟁으로 어지럽고 사격과녁 맞추기까지 끼여 있으니 사찰의 수익을 위한 것인가
행정당국의 방만한 행정 탓인가 관광사찰을 지나 遊興寺刹로 변모해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어느 절에 가나 이런 광경은 차이는 있지만 大同小異하다. 국토가 협소하고
인구는 과잉해서 일반 서민은 유락시설이 없으니 절을 찾아서 놀이터로 삼고 하루를
즐기는 것이 묵인되었으리라 체념해 본다.
내가 그리던 절을 찾으려면 절에 부속된 庵子든지 인적이 드문
험로를 헤치고 심산유곡의 이름 모를 작은 절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찰
주변과 접근로는 절을 찾는 사람의 관심거리다.
지리산 華嚴寺의 진입로, 榮州 浮石寺의 은행나무 진입로,
海南 대둔산 大興寺의 입구, 河東茶의 명산지로 유명한 花開장터부터 雙磎寺에 이르는
십리 벚나무 가로수길, 高敞 禪雲寺의 兎率山까지의 등산로 등은 절을 찾는 이에
경관을 보는 즐거움과 찾아온 이에게 기쁨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제 내가 본 사찰 중 흥미를 끈 곳을 五, 六개처 적어보고자
한다.
和順 영구산 千佛千塔의 雲住寺를 찾았다. 數的으로 千佛千塔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石佛 70구와 石塔 18기만 남아 있다. 이 절은 一柱門도
없고, 절 입구에는 계류나 우거진 나무도 없는 계곡이었지만 아침이라 참관객도 없었고,
많은 石佛과 石塔들이 우리를 맞이하여 고요한 신비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나는 石塔을
돌아보던 중 색다른 石塔을 발견하였다. 통상 우리나라 石塔의 屋蓋石은 方形의 典型樣式인데
원형다층인 탑은 처음 보았다. 마치 버섯을 겹쳐 쌓아올린 꼴이고 탑신 부문이 매우
짧다. 자세히 보니 보물 798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명칭은 雲住寺圓形多層石塔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연구 발표된 바 없어서 알 길이 없다.
운주사를 거쳐 曺溪山 松廣寺를 찾아갔다. 松廣寺는 우리나라
三寶宗刹 중의 하나인 僧寶宗刹을 대표하는 名刹이다. 이 절은 16國師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많은 修道僧이 수도하고 있다. 절에 접근하는 진입로도 계곡과 신록의
거목으로 선경을 이루고 때마침 만발한 벗꽃이 더욱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전각
당우가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기 힘든 大伽藍이다. 大雄殿 뒤 상단에는 건물을 짓지
않는 것이 통례인데 이 절에서는 상단에 說法堂과 修禪社가 있어서 僧寶宗刹 松廣寺의
면목과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仙巖寺가 있다. 順天에서 버스를
타고 약 30분 가면 종점이 나오고, 여기서 20분 신록이 우거진 숲 속 계류를 따라가면
호암선사가 놓았다는 석조 무지개 다리인 昇仙橋(보물 400호)가 멀리 보인다. 승선교
너머로 降仙樓가 있으니 여기가 경치좋은 선경사찰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바로 그
절이다. 慶州 불국사의 국보인 청운, 백운 양교와 같은 수법(아치형)으로 만들어진
이 승선교는 위의 양교에 비해 시간적으로 1000년의 차이가 있으나 이 다리는 溪流自然巖石에
세워진 것이 특이하며 한번 찾아가 볼 만하다. 春麻谷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5월
중순 公州 태화산에 있는 麻谷寺를 방문하였다. 버스 종점에서 사찰까지의 경관도
뛰어나지만 선심교를 지나 해탈문과 천왕문을 통과하면 극락교에 도달한다. ‘여기가
극락정토인가 청류계곡, 우거진 신록, 탑비, 란간과 절의 건물들이 한데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나는 춘마곡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그 진의를 음미할 수 있었다.
대광보전 앞에 있는 오층석탑(보물 799호)의 相輪部(석탑의
꼭대기 부분)가 金銅製로 된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었는데 이번에 직접 보게 되어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적 상륜부와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公州시내에서 甲寺행 버스를 타면 약 30분만에 갑사정류장에 도착한다. 여기서
계류를 따라 우거진 신록사이로 20분쯤 가면 절에 도달한다. 伽藍경내를 둘러보고
게시판을 보니 단지 別莊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본당에서 大寂殿으로 건너가는 개울을 건너가면 功牛塔이 있고,
탑을 향해서 좌측으로 가면 별장이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대적전이 나온다. 이 별장은
李朝 마지막 皇帝인 純宗의 國舅 윤택영의 형인 윤덕영(한일합방 당시 玉碎를 강탈하여
조인을 성사시켜서 일제로부터 子爵 칭호를 받음)이 권세를 이용하여 이 일대 유곡청류가
있는 九曲을 30년 임대계약을 맺고 지은 별장인데 순한국식 건물이며 주변의 숲과
계류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물소리만 들릴 뿐 적막하기만 하다. 大寂殿을 참관하다
마당에 浮屠 한 基가 서 있어서 가보니 이것이 甲寺浮?(보물 257호)이다. 八角圓堂形인
이부도는 조각미가 수려한 걸작품이지만 屋蓋石이 작아서 안정감이 없으며 塔碑나
誌石이 없어서 누구의 부도인지 알 길이 없어서 안타깝다.
榮州 鳳凰山 浮石寺는 돌계단 많기로 이름이 나 있고 절의
본당인 無量壽殿까지 올라가는데 노인들에게는 좀 힘든 곳이다. 이것은 극락정토를
향해 자신을 정화시키며 가도록 배려한 창건자 義湘大師의 치밀한 구도아래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一柱門을 지나서 크게로는 삼단계로 구분되는 축대를 쌓아서
극락정토(여기서는 무량수전)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나라 木造建物의 雙壁을
이루는 修德寺의 대웅전과 이 浮石寺의 무량수전이 모두 국보이나 나는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더 좋아한다. 건축미술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건축물 자체를 운운할 자격이
없고, 9품계단을 올라 무량수전에서 멀리 앞을 바라보면 태백산맥의 겹겹이 싸인
無限江山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大觀望은 이곳을 찾는 이에게 無我之境에
이르게 할 것이 틀림없다. 한국미술사의 유홍준 교수는 이 장관을 국보 0호로 지정할
것을 제창한 바 있는데 수긍이 간다. 그밖에 이 절에는 국보가 넷, 보물이 2기 3종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나 일주문 앞에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거대한 ?支柱(보물
255)가 특히 관심을 끄는 석조물이다.
이번 나들이 여행중에는 사찰외에 史蹟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조를 통하여 金石學의 거상이며 秋史體라는 하나의 書體를 완성한 金正喜
선생의 고택이다. 충남 예산에서 멀지 않은 이 고택은 秋史의 고고한 인품과 그의
예술에 대한 향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때마침 샛노란 은행잎이 정원을 뒤덮고 있었으며
秋史가 어릴 때 뛰놀며 글을 읽었으리라는 상념에 빠져 잠시나마 이 석학이자 대서예가와의
만남이 한없이 기뻤다.
康津과 海南 중간에 조선조 말엽 實學의 대학자 茶山 丁若鏞의
茶山草堂은 험준한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 있었으며 고요하고 그윽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茶山은 19년이나 이 謫所에서 저술생활을 하고 그중 유명한
것으로는 국가 경영의 준칙이 되는 經世 遺表, 治民의 마음가짐과 그 요령을 기술한
牧民心書를 펴냈다.
근세의 명필 海岡 金奎鎭의 0書體로 쓴 象王山開心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開心寺를 방문한 뒤 瑞山磨崖三尊佛像을 찾기로 했다. 태안반도에는 태안마애삼존불(보물
432호), 예산사면불(보물 794호)과 이 瑞山磨崖三尊佛像(국보 84호) 등이 산재해
있어서 지리상 성대했던 중국 불교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서산삼존마애불상은
큰 바위 우측 부문을 浮0한 280㎝ 크기의 三尊立像인데 중앙 불상의 微笑는, 정교함은
없지만 옛스럽고 너그러운 모습은 더없이 순박함을 나타내고 있다. 百濟의 微笑라고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럴 듯하다.
이 가야산 기슭에 천하 明堂 자리가 있다는 지관 정만인의
말을 듣고 大院君은 先占하고 있던 加倻寺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그의 부친 남연군 李球의 묘를 1846년 이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세칭 南延君墳墓盜掘事件의
묘지인 것이다. 묘지인 王公 귀족의 위용도 장식도 없는 평범한 것이었다.
주위의 산세와 지형을 보니 문외한인 나에게도 左靑龍 右百虎의
전형적인 형세가 뚜렷하여 명당 자리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高宗 5년
1868년 독일인 Oppert 일당이 조선의 왕족 분묘에는 금은 보배가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 일확천금을 꿈꾸고 있던 중 대원군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랑하던 조선인 天主敎徒의
복수심과 그들의 야심이 일치 부합되어 盜掘을 자행한 만행이었다. 이 해괴망측한
사건으로 당시 조야는 크게 놀라고 격분하였다. 금은 보배는 얻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원군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 갔다. 쫼
(이 글은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월간 ‘軍事世界’는
해외 거주하는 노병들의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