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오히려 옛날보다
더 평온하게 살고 있습니다
최승우
인간(人間)은 양심(良心)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속에서 ‘내
자신을 잘 알자’라는 인생(人生)의 좌표(座標)를 갖고 살아왔습니다.
인간(人間)은 자신을 모르는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봤기에 자신을
알고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자신을 알려고
고민(苦悶)하고 변질이 안되려고 노력을 해온 사람중 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리 솔직(率直)하게 얘기한다 해도 본의 아니게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도 일부 가식(假飾), 거짓 또는 미화(美化)의 표현이 있을
수 있기에 나는 이글을 쓰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부담스럽고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나의 얘기는 사실 그대로 자신의 실제 체험담(體驗談)으로서 어느 면에서는 자랑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인생은 모두가 군대생활 뿐이었습니다. 나는 군대생활
이전의 인생을 제1의 인생으로, 그리고 군대생활 30여년의 생활을 제2의 인생으로,
앞으로 남은 인생은 제3의 인생으로 생각하고 실제로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고 매우
창창(蒼蒼)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큰 비극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였으며 소위 지방 빨갱이들로 인해서 저희 지역은 지주들을 모두 마디마디를
부러뜨려서 학살을 했습니다. 저희 집은 학살대상 1호격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집안이
그 과(過)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늘 소작인들, 하인들, 일꾼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든 그 뿌린 씨들이 결국 효력을 보게 되었던 것이며 그들이 우리 집안을
보호했음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고 그 내면적 깊이와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쪽박하나 안 깨진 것 같았습니다. 전쟁기간 거의 3년 동안은 특히
식량난이 매우 심각할 정도였었는데 친척은 물론 심지어 형님의 고등학교 친구 가족들까지
저희 집으로 피난을 와서 오래들 묵었고, 제일 많을 때는 40-50여명이나 우리 집에
기거를 했었습니다. 과거를 회상해 볼 때 부모님들께서는 어려울 때 남을 돕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오히려 즐거워하셨던 모습, 지금도 기억이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든 내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 대해서는 항상 소중하게 여기셨던 부모님의
모습은 당시에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후 성장과정을 통해서 확신한
바 나에게 매우 귀중한 교훈을 안겨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육사에 들어가서 지휘 통솔을 배웠고 전방에서 실제로 체험하고, 군 생활을
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관생도 시절 초급장교 시절, 그 당시
생각이었습니다만 가족들이 무사했던 것은 밑에 사람들을 평소부터 아끼고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었으며 유사시 그들의 힘으로 살아남았는데 군대 조직이야말로 더더욱
평소 부하들 마음속으로부터의 존경과 신뢰를 얻는 것이야말로 유사시 또는 위기시에
그 조직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20대 초반부터 확고히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힘(戰鬪力)은 위(上級者)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部下)로부터
올라온다. 즉 힘의 근원은 하부구조다. 소위 빽은 상급자가 아니라 부하들이다. 하부구조와
그 구성요원을 무시하는 상급자나 상부구조는 존재 가치가 없다라는 나의 조직관의
철학이랄까가 그 어렸을 때부터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1965년 육사 21기로 사관학교에 입교를 했습니다. 당시 상급자는 모두 위대(偉大)하게
보였으며 그때 그들의 얘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당시 군대는 ‘이유 없다’ ‘무조건이다’
‘이유를 대는 놈은 빨갱이다’ 등의 표현으로 사고(思考) 즉 생각의 기동성을 철저히
차단시키고 배제하고 있었으며 그런 여건 속에서, 나는 지금 생각을 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군대일수록 이유를 댈줄 알아야지 말이 안된다, 말을 막는 놈이
오히려 빨갱이다’라는 맥락의 반감(反感)을 마음속에서부터 가졌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 조그만 의식(意識)의 밀 알이 훗날 커져서 특히 고급장교 시절에 크게 작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얘기로서 사람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개인 의사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개인이 성장(成長)하고 조직이 발전(發展)하게
되는데 주변의 여건이, 올바른 얘기 또는 직언(直言)으로 인해 개인이 그대로 날라가버리는
풍토, 그러기에 그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고 본전은 유지한다는 이런 분위기가
자연히 생성되게 되는데 이런 좋지 못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는 진정한
도덕적 용기(勇氣)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봅니다.
정당한 사유는 밝히고 말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이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의
리더(Leader)들이 또한 이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리더들이 가정에서 사회에 이르기까지
각계(各界)각층(各層)에 많이 존재해야 국가 사회조직이 발전된다고 믿습니다. 군
생활의 초기부터 내게 도덕적인 용기와 지혜 아울러 내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고민
속에 파묻히지 않고 고민을 끌고 나가려는 정신을 주셨고 나의 조직구성요원들을
바르게 생각하고 고민(苦悶)하고 문제의식(問題意識)을 갖게 하고 당당히 문제제기
의사(意思)표현을 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에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과거 현재 미래의 인생 축선 상에서 누구나 자기 사고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많다고 봅니다. 나 역시 살아오는 동안 혼자서 가슴을 치고 책상을 치며 자기
딴에는 개탄을 한 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나는 그런 후에는 반드시 생각을 했고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언제인가 만약 저 사람과 같은 위치에 장차 가게 된다면 나는
절대로 저런 사람이 안되겠다라고 다짐의 다짐을 하고 컴퓨터에 입력하듯이 분명히
머릿속에 가슴속에 깊이 새겨놓았으며 장차 그런 자리에 가서는 진정 올바른 뜻을
펼 수 있도록 가치관의 내부정립과 행동실천의 습성화 준비를 철저히 해왔었습니다.
한편 병행된 생각은,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 나보다 훌륭했던 생각과 실천을
했던 사람이었고 그런 시절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오늘날 나 같은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무서운 지탄을 받는 것은 저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그간 변질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고 나의 장차 모습일 수 있다라고 깊이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 변질되지 않으려고 자신을 잊지 않고 자기를 알기 위해 노력을
결코 게을리 안했습니다. 또한 내 자신의 생존과 조직을 위해서 가까운 부하일수록
경직되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제가 임관후 전방 양구지역에 소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고(故) 강재구 소령(당시
대위)의 비보(悲報)를 신문에서 읽고 나는 당시 고인이 된 그분과 대화를 해봤었습니다.
물론 혼자서의 자문(自問) 자답(自答)이었습니다. 나는 혼자 생각에 ‘야! 어떻게
수류탄을 가슴에 품고 자폭(自爆)을 하나! 대단한 용기다. 최승우 너는 과연 부하교육에
부하가 실수했을 때 수류탄을 안고 부하들을 구하고 자폭(自爆)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지만 자신 있다는 대답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만 비겁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질문은 ‘강 선배님 당신이 만약에
수류탄이 터지기 직전에 내가 덮쳐야 되나 안 덮쳐야 되나 하고 생각을 했다면 과연
덮쳤겠느냐?’라고 질문을 했으며 만약에 당신이 ‘그래도 덮쳤다’라고 대답을 한다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수류탄은 2-3초면 폭발을 하는데 만약 생각을 하게 됐다면 ‘덮친다?’
육신의 수류탄 파편에 의한 비참한 파열, 사랑하는 가족들 생각, ‘안 덮친다?’
육사까지 나온 중대장이 부하들 죽게 놔두고 나만 살기 위해 현장을 도피(逃避)한
비겁자로 일생동안 지탄(指彈)을 받게 된다는 생각, 기타 이 생각 저 생각, 고민들을
하다보면 2-3초는 순식간에 지나가서 생각 고민 중에 폭발되게 되는데 그래도 ‘자신
있게 덮쳤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두 번째 질문을 했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어서 그런 지고(至高)의 희생(犧牲)정신(精神)과
용기(勇氣)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시 계속 나의 뇌리를 지배했었습니다.
얼마동안 해결의 실마리조차 얻지 못했었습니다. 얼마 후 당시 나를 사랑해 주셨던
육사 교장께서 책을 한권 보내주셨는데 당시 발행된 고(故) 강재구 소령 일기(日記)였습니다.
나는 그 속에서 결국 해답을 얻었습니다.
생도 때부터 산화(散華)하기 전까지의 일기였는데 구구절절 자기반성, 공익을
위한 노력, 고민 문제의식을 올바로 갖고 군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 등으로 일관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 속에서 드디어 ‘아!’ 하는 탄성을 외쳤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평상시 자나깨나 간직했던 사명의식(使命意識)의 일념(一念)이
잠재의식 속에서 분출되어 자기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출되었구나’
라는 나름대로의 답을 얻었습니다. 즉 평소(平素)의 일거수 일투족은 자기도 모르게
내부적으로 축적(蓄積)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위대(偉大)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나도 그분(고 강재구)의 근처에라도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여 그림자 정도라도 되기 위한 노력을 해보자라는 굳은 결의(決意)를 했었습니다.
아울러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의 건실한 믿음의 축적(蓄積)이야말로 더더욱 우리 인생에
한없이 큰 기쁨과 보람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소대장 생활 당시, 열심히 했다지만 세월이 지나며 경륜을 쌓아가면서 뒤돌아보면
항상 아쉽고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여하튼 똘똘 뭉쳐서 재미있게 했었는데
한번은 인접 소대에 당시에는 최고의 고문관이 2명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바보취급을 받아가며 군 생활을 하고 있었던 병사들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확실히 병무행정에 문제가 있어도 많이 있다.’라고 확신을 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면서까지 물건 건드리듯이 툭툭 치거나 차고 지나가도 히히 웃어버리는 그들인지라
나는 속으로 ‘우리 소대원이 아닌 것만도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1966년도 연초 어느 날 점심 식사후 훈련이 없던 날로 기억이 되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들려오기에 자연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소대장(小隊長)에 관해서, 또 어느 사안에 대해서 비판적(批判的)인 얘기를
주고 받는데 비교적 정확히 판단(判斷)하고 있기에 나는 속으로 꽤 똑똑한 놈들이구나
대화내용과 목소리로 보아 분명히 우리 소대원(小隊員)은 아닌 것 같은데 몹시 궁금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시, 대개 외로운 병사들이 냄새는 나지만 양지바른 화장실 뒤편에서 화랑담배
한두 대 피워가며 서로 마음을 달래는 얘기들을 주고 받는데 그런 면에서 관심을
갖고 들어봤던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문 열고 그쪽으로 가서 확인하면 본인들이 무안해
할 것 같아서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와 멀리 돌아서 본인들은 모르게 몰래 살펴보고
당시 나는 큰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바보라고 놀림을
받고 있는 장본인들 그 두명이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잠시 멍했습니다. 나는 제 방으로 돌아와서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세상은 그것이 아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함부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깊이 새겨서 일생동안 간직하기로 당시 굳게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 병사들도 지금은 나이가 50이 넘었을 텐데 그들은 나를 일찍 깨우쳐 준 어느 면에서는
은인(恩人)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송종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아무개로서 전혀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잘 살고 있기를 바라며 한편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고 결코 잊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1968년 2월 어느 화창한 날 당시 28세에 결혼식을 거행하고 10일만에 월남(越南)전선으로
출발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표현할 수 없이 가슴아픈 일일 텐데 아쉬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명령이기에 당연히 따라야만 했고 그러나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나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으니 오직 몸 건강히 잘 다녀와라.”는 확신에 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나의 아내도 나를 일체 동요(動搖)없이 안정되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장모님께서는
작은 성경책을 주시면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배타고 가는 10일 동안 들은 얘기 중에는 월남가면 프레이쿠로 가는데 하루에도
비행기가 여러 대씩 떨어진다는 소리에 그만 기가 푹 죽었던 일도 있었는데 그곳은
미군의 전투지역이었으며 다행히 그곳으로는 안 가고 백마부대 맹호부대를 지원하는
미군 공격용 헬리콥터 비행중대에서 수개월간 전투 헬리콥터 조종사로서 전투임무를
수행했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격을 하고 저녁에 귀대하곤 했는데 전투병력(戰鬪兵力)을
적 진지에 헬리콥터로 공수하는 임무로 수십 대가 날아가서 그 중에는 종종 격추당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다행히 나는 대 구경화기가 아닌 소구경 화기 정도로 여러 번 사격을
받았고 결정적인 부분에는 맞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1년 이상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정신적으로 매우 건강했고 나의 경우 이상할
정도로 두려움, 공포감(恐怖感)이란 전혀 없이 열심히 근무를 할 수 있었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조종사 근무는 1970년도에 마치고 그후 보병 중대장(中隊長)으로 보직을 받고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임관이래 21기 동기생들 중에서도 항상 제일 먼저 진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교만(驕慢)하거나 잘났다고 건방진 생각을 꿈에도
가져본 적은 없었으며 나는 과거 선배들중 일찍 진급을 해서 동기생보다 앞서고 선배들보다도
앞서는 경우, 동기생으로서 또는 후배로서 잘못된 처신(處身)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중 “나도 언제인가 저럴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저
모습이 혹시 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 잘못된 계급의식의 가치관 때문에 나도
저렇게 변질(變質)되어 버릴 수 있다. 정신 차려야만 한다.”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동기생들이라도 먼저 진급을 하면 어떤 경우는 형님소리를 듣게 되는데 나는
그때 조용히 개인 시간을 갖고 진지한 얘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영원한 강자(强者)없고
영원한 선두(先頭)주자(走者)는 없는 법, 계급(階級)은 일을 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군림(君臨)하라고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친구(親舊)관계는 영원(永遠)하고 계급(階級)관계는 유한(有限)한데 어찌 ‘유한(有限)한
계급관계로 인해 무한(無限)한 우정(友情)과 인간관계가 파괴(破壞)’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심어주었으며 가정(家庭)에서도 아무리 동생이 소위(所謂) 출세를
했다 해도 형(兄)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인 법인데 그런 룰(RULE)이 깨지면 그 집안은
깨지게 되어 있는 법, 마찬가지로 우리 군(軍), 그 안의 육사(陸士), 그 속의 동기생(同期生)
관계는 영원(永遠)한 것인데 계급이란 조직에 있어서 일을 하기 위해 주어진 임시
직위에 불과한 것인데 너무 집착하면 더 큰 것을 잃는 우(愚) 즉, 어리석음을 범(犯)하게
되면, 친구는 친구요 선배는 선배인 만큼 친구끼리는 아무리 계급이 차이가 난다해도
사적으로는 완전히 반말로 너니 내니 하고 지내고 선배 역시 아무리 계급이 낮다해도
선배 대우를 개인적으로는 깍듯이 해야 한다.
나는 옛날 어렸을 때에는 반말을 했던 시골 국민학교 1년 선배에게도 깍듯이 존댓말을
하는데 그런 속에서 국민화합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지위가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일이 안되는 것도 아니며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아닌데 계급
체면 자존심(自尊心) 면에서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에 씻기 어려운 우(愚)를 범(犯)하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친한 친구끼리는 반말하고 거리감을 느끼는
친구끼리라면 존댓말을 쓰자 라는 말도 했고 또한 제가 동기회장을 하는 동안에는
친구끼리는 반말을 하자는 반말운동 내용을 가정통신문(家庭通信文) 형식으로 육사
동기생들 각 가정에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나보다도 훌륭했던 선배들이 제 밑에서 하급자로 같이 근무하고 있을 때에도 그런
논리로 근무를 했기에 지금은 이제 선후배 사이로 돌아가서 서로 끈끈하게 떳떳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계급의 진정한 존엄성(尊嚴性)과 권위(權威)의 상징(象徵)의
참뜻을 장군이 되면서 다시 한번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고 잘못된 계급 가치관(價値觀)으로
인해 진정한 힘을 상실하게 된다는 교훈을 확고히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34년간의 군 생활의 마무리짓는 전역(轉役)식(式)을 제가 사단장을 했던
부대에서 거행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용히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선물을 군 생활을
통해서 내려주셨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끝이라고 보는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셨고 어떤 후회나 미련이나 더구나 피해의식과 패배의식을 말끔히
제거해 주셨습니다.
국가(國家)와 인간(人間)을 배웠고 자부심과 긍지는 정(情)과 신뢰(信賴)로 뭉쳐진
조직 속에서만이 진정, 그 구성요원들 간에 공유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으며 모든 힘의 근원은 하부구조에 있고 진정한 힘은 그들로부터 나오며
경직된 곳이 아니라 부드러운 곳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과 평소에는 보잘것 없는
것 같았던 부하들의 존재가치와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 줬을 때 결정적인 때와 장소에서
결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제게 심어 주셨습니다.
또한 군대란 단지 전투에 필요한 전사들만의 수용소가 아니라 먼저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제3의 교육기관이라는 사실을 일찍 초급장교 시절부터 자각토록 일깨워
주셨습니다. 즉(卽), 군에 갓 들어온 젊은이들로 하여금 군대는 자기인생의 황금기를
국가나 군이 합법적으로 박탈해 가는 곳이 아니라 참된 삶의 자세와 의지를 배울
수 있는 교육(敎育)의 도장(道場)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데 최대한 역량을 기울이고
쏟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계급 직위 권한행사에 집착(執着)하기보다는 올바른
역할(役割)에 중심(中心)과 가치(價値)를 두게 해 주셨고 명예는 부하에게, 책임은
본인이 질 수 있는 용기도 주셨습니다.
전쟁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종합전시장이기에 늘 평소부터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인간미 있게 지휘를 해야만 비로소 가장 불합리할 수 있는 전투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군을 끝내며 마지막 얘기를 ‘군(軍)과 인간(人間)에 대해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을 간직했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려 했던 군인(軍人)’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게 해주셨으며, 아울러 나는 ‘하나님께서 지난 34년 동안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에 용기(勇氣)와 지혜(智慧), 믿음과 소망(所望)을 주셨음을 믿고 또한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도 명예(名譽)와 중심(中心)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리라고 확신(確信)을 한다.’며 군을 명예롭게 떠났습니다.
과거 군에 몸담고 있을 때는 마치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군을 떠난 나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오직 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내가 존재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에 서서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은 그 누구에 대한 원망(怨望)
또는 불평(不平) 불만(不滿)을 간직하거나 할 필요조차도 없고 옛날보다 더욱이 평온한
삶속에서 우리 다섯 식구가 하나로 똘똘 뭉쳐 더욱 사랑하면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시점에 서서 우리를 늘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 은혜(恩惠)속에서 살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