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50년의 의미
이민수
조장(助長)이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북돋아 빨리 자라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말 뜻 속에는 오히려 “속성하기를 바라다가 일을 그르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옛날에 한 농부가 곡물이 어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줄기를 잡고 위로 끌어
올리다가 결국 농사를 망쳤다는 어느 고사(古事)는 조장이라는 낱말의 숨은 뜻을
잘 알려준다. 이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일에는 바라는 만큼의 성과를 얻기
위해 요구되는 인내가 필요하다.
역사와 전통 역시 속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아서는 안될 것들 중의 하나이다.
역사와 전통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 성숙의 그윽한 향이 우러나올 때에야 비로소
수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사는 지난해 개교 50주년을 맞았고 반 백년의 의미를 살려 대대적인 행사를
치룬 바 있다.
개교 기념일이었던 5월 1일을 전후하여 육사는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간 육사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육사 반세기의 역사를 “영욕의 반백년”
세월이라 평하였다.
그와 같은 평판은 그동안 배출된 만여명의 졸업생 가운데 1/10을 상회하는 1,600여명의
동문이 나라를 위하여 산화한데 대한 감사의 표현임과 동시에, 5.16 혁명이후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임으로써 군 본연의 임무를 저버린 일부 졸업생들에 대한 질책의
표현이기도 했다.
실로 육사 반 백년의 역사는 장구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화랑대의 이
역사가 이 나라 대한민국이 새롭게 태어난 직후의 혼란한 와중에서 출발한 역사임을
감안해 보면, 도도히 흐르는 강물의 힘처럼 육사가 거쳐온 시간의 축이 결코 짧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랑대가 겪어온 50년의 세월이 주목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반 백년이라는
단지 가시적인 시간의 흐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육사인이 지내온 50년의 역사가 중요시되는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화랑인으로서의 기품과 멋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요, 조국이 위태로울 때는 언제라도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자기희생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요, 역경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내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가 우리들 대부분의
가슴속에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항상 그렇게 부르고 싶어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하는 이른바 ‘육사정신’
혹은 ‘육사혼’의 전통이 50년의 역사를 통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화랑대가 있기까지 많은 육사인들은 거친 숨을 고르며 내일을 향해 뛰었고
그 뒤를 이어 더 많은 젊은이들이 뛰면서 비로소 전통이라는 형태의 결실을 맺어
우리들 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세월은 가히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인의 기품과 멋은 쉽사리 조장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지난 세월동안 모진 풍파와 격랑속에서 형성된, 그래서 그만큼
더 값지고 의미있는 것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였던 ‘동문 퍼레이드’와 ‘참전 일일입교’는 이와같은
사실을 더욱 더 잘 보여준다.
5월 4일 푸르던 화랑연병장에서 펼쳐진 ‘동문 퍼레이드’는 가히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다.
그곳에 참석하였던 모든 동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그 행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감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 동문이 참여한 동문 퍼레이드를 통해 그날의 참석자들은
물론이요, 훗날 그 장관(壯觀)을 전해 들었던 동문들까지도 화랑대의 전통이 결코
조장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속에서 인고의 풍랑을 겪으며 형성된 값진
것이었음을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랑대에서 임관의 기쁨을 맨 처음 맛보았던 노령의 동문들과 그들이 만든 전통을
지키고 가꾸어온 젊은 청년들이 함께 벌렸던 동문 퍼레이드야말로 화랑대의 전통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예이다.
그날은 정말 커다란 잔치의 한마당이었고 패기의 젊음과 노령의 원숙함이 함께
어울려 우리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감동의 잔치였던 것이다.
또한 전장터를 누비며 젊음을 불살랐던 선배님들과 이제 배움의 길에 들어 서서
그분들의 지혜를 얻고자하는 젊은 사관생도들이 한자리에 앉아 하루밤을 함께 나누었던
‘참전 동문 일일입교’ 행사 역시 인고의 세월을 거친 화랑인들만의 자랑스런 행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잔치가 끝난 이 순간 정작 우리 화랑인들이 숙고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날의 자랑스러움과 기쁨과 즐거움의 간직만이 아닐 것이다. 50년이라는
세월의 길이가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화랑대가 일구어낼 앞으로의 역사에 비하면
지나간 50년의 역사는 일천한 순간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들 주변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이제 우리가 50년의
장구한 역사앞에서 마냥 즐거워만 해서는 안되는 까닭은 반세기의 자랑스런 역사를
지닌 우리 화랑인들의 성숙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자문해 보아야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폭죽이 터지고 웃음소리가 가득한 연회장은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곳이다. 자성(自省)을
통한 성숙을 꾀하는 것은 잔치가 끝난 뒤의 일이다.
50 잔치의 무드가 걷혀진 지금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장구한 역사의 출발점에
서 있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과제들은 많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늘 자성(自省)하는
마음가짐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정진(精進)하는 일이라 믿는다.
정진과 자성 모두가 필요한 까닭은 정진은 우리의 진보를 위한 필수조건이며,
자성이 없이는 전진의 방향을 올바르게 판가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일구어온 전통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먼훗날 우리의 후배들이 충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지켜나갈 ‘참다운 전통’을 수립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개교 50주년의 즐거웠던 잔치는 내일의 인고를 위한 서곡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미래의 더 나은 발전을 기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육사인 모두는 개교 50주년의 모토인 “가슴에 조국을, 두눈을 세계로”를
되새기면서 보다 넓은 안목과 통찰력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육사 50년이 한국 근대사에 미친 크고 작은 영향에 대해서 재확인하며 육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합니다)